[오늘과 내일/오명철]급 안 되는 정부, 감 안 되는 장관

  • 입력 2006년 8월 24일 03시 01분


코멘트
대한민국 문화부 장관은 문화인인가? 그렇지 않다. 차라리 정치인에 더 가깝다. 역대 문화부 장관의 면면이 이를 입증한다. 1990년 1월 3일 출범 이후 청와대와 정치권의 실세들이 줄줄이 문화부 장관을 차지했다. 이수정 이민섭 주돈식 김영수 송태호 신낙균 박지원 김한길 남궁진 김성재 정동채 씨 등이 그들이다. 문화인의 범주에 드는 사람은 초대 이어령 장관과 영화감독 출신의 이창동 장관, 연극계 출신의 김명곤 현 장관 정도다. 출범한 지 16년밖에 안 되지만 벌써 14대 장관이 재직할 정도로 바람도 많이 탄다. 앙드레 말로와 자크 랑은 각각 10년씩 프랑스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부의 이름도 문화부-문화체육부-문화관광부로 바뀔 정도로 ‘정체성’도 오락가락했다. 요즘 같아서는 차라리 ‘문화도박부’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전문성 없이도 관록으로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만만한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화 예술 관광 체육 레저 종교 언론 등 다양한 분야를 담당하고 있어 얼굴 내밀 일이 많고, 생색낼 것도 적잖아 정치인 출신들이 경력 관리 차원에서 특히 선호한다. 산하 기관과 단체가 많다 보니 인사 민원도 적당히 챙겨 줄 수 있다.

문화부 창립 이후 직간접으로 역대 문화부 장관을 겪었다. 이어령 장관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였고 이수정 주돈식 장관은 전문가 못잖은 안목을 갖고 있었다. 남다른 문화 애호가인 김영수 장관은 재임 중에는 물론 퇴임 이후에도 다채로운 지원 활동으로 문화계와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하지만 ‘감 안 되는’ 장관도 수두룩하다. 취임 이후 난생 처음 오페라를 보았다는 장관도 있었고 고유 업무보다 청와대 출입과 정치권 민원 해결에 더 열중하는 장관도 봤다. 실세 장관일수록 본연의 업무보다 정치권 동향 파악과 대통령 모시기에 더욱 열심이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다행히 문화부 공무원들은 정부 내 어떤 부처보다 우수하고 리버럴하다. 행정고시 전체 수석이 1996년 문화부를 지원해 화제가 됐고 2000년에는 연수원 수석과 상위권 여성 공무원이 들어왔다. 2004년에는 일반 행정직 2등과 국제통상직 1등이 문화부를 지원했다. 2005년 7급 공채 신규 임용에서는 23명 전원이 상위 20% 이내였다.

이들의 표상(表象)인 유진룡 차관의 전격 경질을 보면서 대한민국 문화부의 위상과 젊고 유능한 문화부 공무원들의 장래가 정말 걱정스럽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문화부는 청와대와 정치권의 민원 분소(分所)가 돼 버릴지 모른다. 과장 때부터 지켜본 유 전 차관은 한마디로 스마트한 엘리트 공무원이다. 늘 잘나가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기자들과 토론을 할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을 정도로 소신도 있었다.

한 달여 전 그의 집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정부 출범 후 공무원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일절 관청 출입은 하지 않았지만 예외적으로 뒤늦은 취임 축하 인사를 간 것이다. 놀랍게도 차관 집무실은 회전문이었고 그는 문을 반쯤 연 채 외부 인사를 접견하고 있었다. 차 한잔을 마시고 회전문을 가리키며 “굳이 이럴 것까지 있느냐”고 했더니 그는 씩 웃었다. 그는 헌법재판소의 신문법 관련 결정을 정부 측의 승리로 파악하고 있었다.

입장은 달랐지만 현 정부에 이만한 차관이 있는 것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 다행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취임 6개월 만에 ‘급(級) 안 되는’ 인사들에 의해 쫓겨나는 것을 보니 대통령도 참 박복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후 속사정을 모르는 한명숙 국무총리가 22일 ‘바다이야기’ 사태와 관련해 문화부를 대놓고 질책한 것은 한마디로 코미디다.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김명곤 장관의 태도도 너무나 실망스럽다. 문화부 공무원들도 때론 불의에 맞서 싸워야 부의 위상과 직업공무원의 자존심을 지켜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 바란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