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영언]1번 찍은 사람들

  • 입력 2006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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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지방선거에서 나타난 여러 현상 중 하나로 집권세력에 비교적 우호적이던 유권자들의 ‘정신적 방황’을 들 수 있다. 회사원 A(55) 씨 경우를 보자. 선거 당일 그는 기호 1번인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표를 찍고 나오면서 마치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투표를 기다리던 한 중년 신사가 “똑바로 찍으셨지요” 하고 묻는데 얼굴을 쳐다볼 수 없더라는 것이다.

평소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지자로 자처해 온 그였지만 이번엔 정말 혼내 주고 싶었다고 한다. 투표소에 가기 전 아내와 딸에게 1번만 빼고 아무 데나 찍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기표소에서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한나라당에 몰표가 쏟아질 게 분명한데 자신이라도 균형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는 것이다.

평소 열린우리당 성향이던 인사들을 선거 후에 만나 보니 노 정권에 대한 애정이 많이 식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똘똘 뭉쳐 지지하던 그들이었지만 이번 선거에선 여러 갈래로 분화(分化)됐다. 아예 기권한 사람, 지지 정당을 바꾼 사람, 그래도 1번에 찍은 사람…. 곱씹어보게 하는 사실은 1번을 찍었다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못 할 짓이라도 한 것처럼 미안해했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얻은 평균 득표율은 20%대로 다수당에 부여되는 ‘기호 1번’의 체면을 구겼다. 시도지사 27.1%, 시군구청장 23.1%, 시도의원 23.7%, 시도의원 비례대표 21.6%, 시군구의원 19.3%, 시군구의원 비례대표 24.1%로 모두 한나라당의 절반이 안 됐다.

한국 정치에는 30:40:30이라는 ‘지지율 가설’이 있다. 어느 정권이나 30%의 지지, 30%의 반대세력은 있기 마련이어서 승패는 결국 중간의 나머지 40%에 의해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이들 40%는 집권세력의 국정운영 실적에 따라 여야를 넘나드는데, 2004년 4월 총선 때는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다가 이번 선거에선 한나라당으로 돌아섰다. 열린우리당의 득표율이 하나같이 20%대에 머문 것을 보면 30%의 지지세력 중에서도 등을 돌린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하다.

정치의 요체는 적(敵)은 줄이고 친구는 늘려 가는 것이라고 한다. 노 대통령은 그제 현충일 추념사에서 “우리 정치도 적과 동지의 문화가 아니라 대화와 타협, 경쟁의 문화로 바꿔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적을 많이 만든 사람이 그 자신이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때 48.9%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를 지키면서 상대 후보를 찍은 46.6%의 반대세력까지 껴안아 외연(外延)을 넓혔더라면 이처럼 참담하게 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껴안기는커녕 지지하던 사람들조차 절반이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하게 만들었으니 누구 탓을 하겠는가. 선거 후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 대통령 지지율은 20.2%로 최악이었다. 끝없는 편 가르기, 서투른 일처리, 얼치기 좌파정책, 국민에 대한 무례(無禮), 실속 없이 포장만 요란한 로드맵…. 이 모든 것이 엮어낸 결과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정책기조는 그대로 유지한다’며 대범하다. 열린우리당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선거 참패의 원인과 수습방안을 놓고 일주일 넘게 입씨름만 하고 있다. ‘기호 1번’을 선택한 사람들을 더 부끄럽게 만드는, 대책 없는 정권이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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