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증오의 정치, 눈물의 정치

  • 입력 2006년 5월 2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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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헌법 제정(1787년) 논의 과정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선동가(demagogue), 즉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 지도자의 출현 가능성이었다. 대중을 위한다는 구호가 결국 ‘다수의 폭정(暴政)’이나 ‘코드 독재’에 악용될 것을 걱정한 것이다. 프랑스혁명 때 테러정치를 했던 자코뱅당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도 “프랑스에는 인민(人民)과 그 적(敵), 두 진영이 있을 뿐이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포퓰리스트들의 선동수법 중 ‘부드러운 수단’은 감성적 호소다. 눈물이 대표적이다. ‘강한 수단’은 증오(憎惡)다. 그 극단은 테러다. 미국 헌법의 산파인 제임스 매디슨도 선동가들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을 부추겨 국가 사회가 분열할 가능성을 가장 우려했다. 그 대책으로 만든 것이 대의정치, 법치(法治), 그리고 3권 분립체제였다.

포퓰리스트의 ‘정치적 공리’를 정리해 보자.

‘2+2=5’라는 계산법을 혼자 주장하면 ‘바보’다. 그러나 100만 명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표밭’이다. 더 확산되면 ‘운동’이 된다. 만약 이 계산법이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해 믿게 만들면 그는 ‘성공한 정치인’이 된다. 물론 ‘좋은 지도자’와는 관계없다.

‘바보 노무현’의 출발점은 바로 이 계산법이다. 3전(顚)4기(起)의 무모한 영남 도전 끝에 호남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 민주당 후보가 됐다. 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의 눈물’이라는 정치광고로 유권자들의 감성 코드를 자극했고, 결국 당선됐다.

하지만 정치 투신의 동기를 ‘사회에 대한 증오와 분노’라고 꼽았던 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증오의 정치를 계속했다. 1년 전까지 “한국 경제는 좋아질 것”이라더니 양극화(兩極化)를 들고 나와 빈부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나 ‘강남 때리기’ 부동산정책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현 정부 들어 상류층 일부는 중산층, 중산층 상당수가 빈곤층으로 하향(下向) 이동했다는 정부 통계는 현 집권층에 정치적으로는 무의미한 수치일 뿐이다.

17대 총선에서 국민이 만들어 준 과반의석으로 여당이 한 일도 과거사 파헤치기, 국가보안법 폐지 추진 등 ‘국민 편 가르기’다. 헌법재판소의 수도 이전 위헌 결정 때는 ‘선출된 권력론’을 앞세워 법치(法治)의 근본마저 부정했다. 매디슨 같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증오의 정치이자, 다수의 폭정이다.

그랬던 여권이 지방선거 참패가 예상되자 눈물의 정치로 전략을 바꾼 것을 보면 아직 ‘2+2=5’의 계산법을 국민에게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눈물도 증오도 더는 통하지 않으면 포퓰리스트의 남은 수단은 ‘판 흔들기’밖에 없다.

정동영 의장이 지방선거 후 정계개편과 개헌 가능성의 자락을 깔고, 남북정상회담의 군불 때기가 시작된 것이 모두 정국 반전을 겨냥한 노림수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란(大亂)은 대치(大治)로 이어진다’는 마오쩌둥(毛澤東) 식 계산법 아닐까.

이 와중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테러사건은 갖가지 정치적 의혹에도 불구하고 ‘한 전과자의 단독 범행’으로 결말지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찜찜함이 남는 것은 혹시라도 이 사건이 대혼란의 예고탄 아니었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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