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미석]가슴 속의 대못

  • 입력 2006년 5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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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의미와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 주는 홈 코믹터치 드라마.’ 공영방송의 한 일일극이 내세운 캐치프레이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가족들이 걸핏하면 목청을 높이며 대립한다. 부부, 모자, 동서 간에도 서슬이 시퍼렇다. 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병원에 데려가 아기를 지우라고 강요하고, 며느릿감이 정성스레 해온 음식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쏟아 붓는 어머니도 나온다.

옆 채널에서 같은 시간대에 방영하는 드라마도 오십보백보다. ‘희망찬 사랑을 꿈꾸는 이 시대 서민들의 행복 찾기’라는 구호를 앞세운 이 드라마는 거짓 임신으로 부모를 속이고 결혼하는 동생, 혼전 임신한 언니, 원치 않은 사윗감이란 이유로 딸에게 낙태를 종용하는 어머니까지 거의 ‘콩가루 집안’이나 다름없다.

나만 그런 것일까. 요즘 TV 드라마에 나오는 가족들을 보면 ‘저건 아닌데…’ 싶어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젊은층의 연애놀음을 보여 주는 주말극이나 미니시리즈의 비상식적인 설정은 아예 논외로 해도, 이른바 ‘가족극’을 표방하는 일일 드라마에도 수상쩍은 가족들이 온통 판을 친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봐도 자녀를 소유물처럼 대하는 부모, 장성한 뒤에도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모한테서 못 헤어나는 자식들, 가족 사이에 오가는 거칠고 난폭한 말과 행동은 한국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다. 혹시 방송사들이 새로운 가족 이데올로기 정착을 목표로 ‘혈연 가족’의 문제점을 파헤쳐 보자고 일제히 나선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드라마에 도덕교과서 역할까지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TV에서 홍수를 이루는 ‘일그러진 가족’들의 초상은 시청률을 겨냥한 방송사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나 식상하고 천편일률적이라 재미와 오락성이란 측면에서도 기대에 못 미친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선 ‘월튼네 사람들’이나 ‘초원의 집’ 같은 외화나 ‘전원일기’ 같은 국내 드라마처럼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훈훈한 가족극이 있었던 시대가 그립기도 하다.

가족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가족 해체’니 ‘대안 가족’이니 하는 말이 유행처럼 오르내리는 요즘 가족이나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일은 되레 진부하고 시대에 뒤진 것처럼 취급되곤 한다. 빠르게 달라지는 세상에서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도 빛이 바랜 듯 보일 때도 있다. 하기야 살다 보면 피를 나눈 가족이 생판 남보다 못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가족이 ‘사랑’이란 이름 아래 서로의 가슴에 쾅쾅 박아놓은 대못은 그 아픔이나 흉터의 흔적도 타인보다 오히려 더 깊고, 크게 남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집’이나 ‘가족’, 이런 오래된 단어에 애착이 간다. 부모나 형제, 부부든 자식이든 넝쿨처럼 징글징글하게 얽혀 사는 가족이야말로 병도 주고 약도 주는, 고통의 근원이자 고통을 치유하는 힘이라고 믿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한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하기 때문에 헤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아마도 ‘참’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가정의 달 5월, 부모와 자녀에게 생색용 선물이나 외식보다는 서로서로 위안 되는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내 가슴에 박힌 대못, 또 나로 인해 누군가의 마음에 박힌 대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가족이 출발하는 지점이 아닐까….

고미석 문화부 차장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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