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3년 김시현 선생 무기밀반입 사건

  • 입력 2006년 3월 1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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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6차례, 모두 18년의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 저격을 기도해 감옥에 갇힌 무기징역수.

4·19혁명 직후 특별사면, 복권돼 5대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에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보탠 김시현(金始顯·1966년 작고).

1923년 3월 15일은 그가 주도한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무기 반입 거사가 조선총독부의 공식 발표로 세상에 알려진 날이다.

김시현과 함께 당시 일제 경찰에 체포된 이는 11명이었다. 이들이 수하물로 위장해 반입하려던 무기는 대형 폭탄 6발, 소형 폭탄 30발, 권총 13정 등.

총독부는 중국 베이징(北京)에 근거지를 둔 의열단이 이들 무기를 조선에 들여와 관공서를 폭파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김시현은 당시 반입 무기를 ‘동포들에게 선물할 설날 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포들은 그 ‘선물’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용맹함에 감탄했고, 동아일보는 그의 서대문형무소 생활을 생중계하듯 수시로 보도했다.

같은 해 12월 ‘비통(悲痛)한 부자(父子)의 심정(心情)’이란 기사에는 단식 투쟁 중이던 김시현과 부친 간의 애끓는 대화 장면이 소개돼 있다.

“네가 절식을 계속할 것 같으면 나는 오늘 밤 집에 가서 가슴에 칼을 꽂고 단연히 자살을 하겠다.”(부친)

“(눈물 젖은 눈으로 부친을 바라보며) 그와 같이 말씀하시면 하는 수 없이 밥을 먹겠습니다.”(김시현)

동아일보는 그의 이감(移監)과 감형(減刑) 소식도 거의 빠짐없이 보도했다.

1929년 1월 그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할 때 동아일보 기자는 형무소 앞에 찾아가 그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의 대답이다.

“일부러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5년 5개월의 징역살이 동안 느껴진 바가 어찌 한둘에 그치겠습니까만 말 못할 것이 대부분이니 차라리 묻지 말아주십시오.”

그의 가족사는 자체가 독립투쟁사나 마찬가지이다. 부인 권애라(權愛羅) 여사는 건국훈장 애국장, 동생 김정현(金禎顯)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들이다.

하지만 정작 김시현은 ‘훈장 없는 독립투사’다. 1952년 6월 같은 의열단 출신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독재체제를 강화해 가던 이승만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던 일 때문이다.

하늘에 있는 그에게 “지금 심정은 어떠십니까?”라고 물으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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