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바첼레트 대통령

  • 입력 2006년 3월 1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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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건이라면 대통령 하기도 참 재미있겠다.”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11일 취임한 미첼 바첼레트(54) 대통령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슈피겔지가 던진 말이다. 유럽이 꿈도 못 꾸는 6%의 경제성장을 하는 나라, 민주주의와 화해의 상징인물, 게다가 국민의 사랑까지 받으며 국정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바첼레트 대통령은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의 희망을 이뤄 주는 일”이라고 점잖게 답했다.

▷칠레는 가톨릭 국가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마초’의 나라로 꼽힌다. 이혼이 합법화된 것이 불과 1년 반 전이다. 낙태란 말은 아주 진보적인 사람조차 입에 담기를 꺼린다. 그런 나라에서 무신론자에 이혼 경력이 있는 세 아이의 싱글맘 대통령이 나왔다는 건 통쾌한 충격이다. 그래서 바첼레트의 취임은 1980년대의 경제 자유화, 1990년대의 정치 민주화에 이어 2000년대의 문화적 개방으로 평가된다.

▷1973년 9월 11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그는 스물한 살의 의대생이었다. 공군 장교였던 아버지가 처형당하고, 어머니와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남자 친구는 ‘행방불명’됐다. 과거 자신을 고문했던 사람을 산티아고 시내 빌딩의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 그러나 바첼레트는 증오를 말하는 대신 “그 증오를 거꾸로 돌리는 데 내 삶을 바쳐 왔다”고 했다. 정적(政敵)을 공격하지 않는 포용과 관용이 그의 힘이다.

▷아무리 인기가 높다 해도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낱 거품일 뿐이다. 칠레는 다른 남미국가와 달리 1980년대 군사독재 아래서도 시장개방과 민영화 등 경제 자유화에 성공한 나라로 꼽힌다. 사법권이 독립돼 있고 시민사회가 탄탄한 덕분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도 있었다. 최근 남미에 ‘좌향좌’ 바람이 거세고 바첼레트 대통령도 중도좌파연합 소속이지만, 간판이 같다고 해서 똑같은 좌파정권이랄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국민 잘살게 만들겠다는 대통령을 만난 칠레가 부럽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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