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수형]‘유죄만’ 검사의 퇴장

  • 입력 2006년 1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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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별명은 ‘유죄만’이다. ‘유죄만 받아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 유재만(柳在晩) 부장이다.

유 부장이 기소한 사건은 백발백중 유죄판결로 이어졌다. 지난해 6월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이 난 이인제(李仁濟) 국민중심당 의원의 불법정치자금 사건이 거의 유일한 예외다.

그런 그가 검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가 사표를 낸 이유는 어려운 가정사정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중증의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 바쁜 남편 때문에 혼자 아이를 돌보느라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건강이 나빠진 부인, 서울 양재동 꽃시장 부근의 허름한 연립주택….

그러나 그의 사표는 그런 이유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어렵지 않은 가정이 어디 있겠는가.

20일 오후. 유 부장은 정상명(鄭相明) 검찰총장의 부름을 받고 총장실에 들렀다.

“꼭 그만둬야겠나?”

“검사로서 천운(天運)이 다한 것 같습니다.”

유 부장은 신건(辛建) 전 국가정보원장 이야기를 했다. 신 전 원장은 그의 고교 선배다. 영남 정권 시절 호남 출신으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과 법무부 차관까지 지낸 신 전 원장은 호남 검사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신 전 원장은 유능하고 정확한 유 부장을 특히 아꼈다. 유 부장은 지난해 말 도청사건 수사팀장으로 신 전 원장을 직접 구속했다.

“존경하던 선배를 제 손으로 구속했는데 어떻게 더 검사를 하겠습니까?”

그가 조사실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잇따른 자살도 번민을 더한 것 같다. 그가 대검 중수부 과장으로 대선자금을 수사하면서 참고인으로 조사했던 정몽헌(鄭夢憲) 현대그룹 회장과 남상국(南相國) 대우건설 사장이 2003, 2004년에 잇따라 자살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국정원 도청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던 이수일(李秀一) 전 국정원 차장이 자살했다.

유 부장은 요즘 매주 교회에 나가 4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마음을 다스린다고 한다.

유 부장의 얘기를 듣던 정 총장이 말했다.

“자네를 잡지 않겠네. 잡을 수도 없고….”

죄와 벌은 숙명이다. 누군가 죄를 짓는다면 누군가는 벌해야 한다. 칸트는 말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이 섬을 버리고 흩어지기로 결의한 경우에도 감옥에 남은 마지막 범죄자는 처벌하고 떠나야 한다”고. 그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이겠는가. 따지고 보면 인간 모두가 죄인일 수도 있다. ‘세상은 범죄고 인생은 그 자체가 범죄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벌을 받는 것도 괴롭지만 벌을 가하는 것도 고통일 것이다. ‘유죄만’의 검사 인생 17년은 그런 고통을 짊어지고 온 삶일 수도 있다. 그의 사표 소식을 듣고 ‘칼의 비애’를 느낀다는 검사도 많다.

설 연휴가 지나면 유 부장은 검찰을 떠나 새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그의 새로운 삶에 좋은 일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그것이 사회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온 사람에 대한 작은 예의일 것 같다.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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