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영언]承服이 뉴스가 돼선 안 된다

  • 입력 2005년 10월 27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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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서울시장은 한나라당 일각에서 거론되는 ‘박근혜-이명박’ 차기 대선 후보 단일화론에 대해 “누가 경선을 통과해도 결국 진 쪽이 상대를 돕게 되는데 (사전에) 연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그제 말했다. 경선에 지더라도 탈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이 시장은 며칠 전 관훈클럽 토론회에서도 “무조건 출마는 있을 수 없으며 당내 경선을 거쳐 결과에 승복(承服)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자 칭찬이 잇따랐다. 당 외부 인사 영입위원장인 김형오 의원은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한다면 하는’ 강한 성격이기에 어떤 장애도 무릅쓰고 무조건 출마할 것이라는 세간의 소문이 사실처럼 생각될 수 있었다. 이런 세속적 판단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이명박을 다시 봤다. 새로운 발견이었다”고 평가했다.

따지고 보면 우스운 얘기다. 지난해 3월 개정된 정당법은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사람은 당해 선거에 후보자로 등록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제한이 없다 하더라도 소속 정당의 대통령후보가 되려면 당내 경선에 나서야 하고 패배하면 승복하는 것이 정상이다. 경선 승산이 없다거나, 경선에서 졌다고 당을 떠나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이 시장의 발언이 화제가 되는 것은 불복(不服)으로 점철된 지난날의 정치사 때문일 터이다.

1997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DJ 승리의 일등공신은 이인제 씨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실제 이 씨가 신한국당 경선 결과에 불복하면서 당을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이회창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씨는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후에도 똑같은 선택을 함으로써 ‘불복의 대명사’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정치인으로서 국민에게, 당인(黨人)으로서 정당에 한 승복 약속을 두 번이나 저버린 이 씨의 행위는 대선후보 경선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민주적 경선을 통해 후보를 결정하고 승자와 패자가 한마음으로 정권 창출에 노력한다는 정당 정치의 기본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씨가 승복의 정치를 실천했더라면 한국 정치의 지형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뭇 다르게 전개됐을 가능성도 크다.

1992년 민자당 후보 경선 때 김영삼 후보의 승리에 반기(反旗)를 들었던 이종찬 씨도 마찬가지다. 당시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김 후보를 흔쾌히 도왔더라면 그 후 그의 정치 궤적이 달라졌을 것이다.

총선이나 지방선거 과정의 불복 사례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어제 끝난 10·26 재선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경기 광주와 대구 동을 지역에서 일부 인사가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다가 낙천하자 당을 떠났고, 몇 명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공천 승복 서약서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경우는 다르지만 다음 달 2일 경북 경주 등 4개 지역에서 실시되는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 유치 주민투표에도 불복이 예고되고 있다. 유치 반대 세력을 중심으로 투표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협박성 발언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정정당당한 경쟁과 결과에 대한 승복은 투표의 불문율(不文律)이다. 승복이 뉴스가 되는 세상이라면 민주주의는 체화(體化)되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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