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국사학계 민족-통일중심사관 비판한 이주영 건국대 교수

  • 입력 2005년 10월 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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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적인 명분 위에 세워진 역사는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집니다.” 이주영 교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혼란을 막기 위해 ‘자유주의’에 입각한 사관을 확고히 세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원대연 기자
“추상적인 명분 위에 세워진 역사는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집니다.” 이주영 교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혼란을 막기 위해 ‘자유주의’에 입각한 사관을 확고히 세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원대연 기자
“역사 지식이 사회 변혁의 수단, 정치적 공격의 무기로 활용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역사학을 마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도구처럼 이용하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지난달 29일 연세대에서 열린 ‘교과서포럼’에서 한국 근현대사 학계의 ‘민족주의, 통일중심주의’ 사관에 대해 비판을 가한 건국대 이주영(李柱영·사학) 대학원장. “나는 평생 조용히 지내온 사람”이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는 이 교수를 6일 오후 대학원장실에서 만났다.

그는 비판 발언을 하게 된 이유를 묻자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시도, 강정구 교수의 6·25전쟁 관련 발언 논란 등을 언급하면서 “그동안 학계에는 이런저런 의견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 침묵해 왔으나, 대한민국의 정체성 위기가 심각한 상황인 만큼 이제는 적극적으로 발언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우선 우리의 근현대사 연구 풍토에 대해 ‘실제 있었던 일’을 밝히고 서술한다는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실증보다는 ‘주체성, 민족, 통일, 민중, 민주화’ 등의 명분, 희망, 염원과 같은 추상적인 대의명분에 집착한다는 것. 그는 “이것은 역사학을 학문의 영역이 아닌 종교의 영역으로 넘기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적 변혁과 분단의 자주적 극복을 목표로 변혁의 주체를 민중으로 내세운 ‘민중-통일 사학’뿐 아니라 주류 역사학계의 ‘민족주의 사학’도 이러한 비현실적, 감성적 역사인식을 불러온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통일은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향해 역사 연구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사실을 희망에 따라 곡해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민중-통일 사학’은 역사 연구의 궁극적 목표를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에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강만길(姜萬吉) 교수는 그와 같은 ‘현재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역사학이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통일에 도움이 될 사실(史實)’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통일에 도움이 되는 역사적 사실만 진실이고, 도움이 안 되는 사실은 다 버리는 것이 학자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통일’ ‘민족’ 등의 거창한 대의명분을 걸어놓고 나와 다른 인식을 하는 사람은 ‘반민족주의자’라고 몰아붙이는 횡포는 없어야 합니다.”

이 교수는 이들 역사학자가 ‘통일의 가능성’에 최우선으로 집착하다 보니 광복 직후의 좌우합작파와 남북협상파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부 주도의 과거사 청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근래 집권한 역대 정부들이 ‘역사 바로 세우기’, ‘제2의 건국’, ‘과거사 청산’ 등 정부 주도의 과거사 청산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란 것은 연속되는 것이지 무 자르듯 잘라 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자유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켰던 인사들을 상당수 포함시켰습니다. 일제강점기 어쩔 수 없이 친일단체에 가입하고, 학병 기고문을 쓴 인사 중엔 우파뿐만 아니라 중도, 좌파 인사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일인명사전에서 월북 인사나 중도, 좌파 인사들은 대부분 빠졌어요. 이것은 과거사 청산에도 어떤 특정한 이념적 잣대가 적용되지 않나 하는 의심을 낳게 합니다.”

―‘교과서포럼’에서 이인호(李仁浩) 명지대 석좌교수는 ‘주류 역사학계에서 광복 후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손을 놓고 있는 바람에 근현대사가 재야 사학자들이나 비전문가들에 의해 요리됐다’며 사학계의 반성을 촉구했습니다.

“역사학계 전체를 보면 ‘민중-통일사관’을 가진 연구자들은 일부분이지만, 현대사 연구 분야에서는 압도적입니다. 특히 정치 권력과 연계되면서 더욱 두드러져 보입니다. 현 정권 들어 각종 과거사위원회가 생기면서 정부 예산이 수백억 원씩 투입되고 있습니다. 주변에 역사학자들이 흘러 다니는 돈을 따라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이 보입니다. 비록 이들은 소수이지만 사학계 전체를 대변하는 듯 보이고, 다른 사람들은 숨죽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위기를 불러온 책임이 역사학계에 있다고 지적하셨는데요.

“현대사 관련 책을 보면 분단된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부, 이승만 박정희 등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전부 다 독재자, 몹쓸 사람으로 매도됩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해서 우리 민족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을 벗어나게 해 준 나라가 됐고, 반세기 만에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는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이주영 교수는

△1942년 평북 용천 태생

△1966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

△1973년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역사학(석사)

△1982년 서강대 대학원 서양사(박사)

△1979년∼현재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01∼2002년 건국대 서울캠퍼스 부총장

△2001∼2002년 역사학회 회장

△2004년∼현재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

△2004년∼현재 건국대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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