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76>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10월 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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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앞장선 보졸(步卒)들 가운데로 적의 철기(鐵騎)가 뛰어들면 전군의 혼란은 피할 수가 없다. 그 혼란을 끝내는 길은 이편의 철기가 나가 적의 철기를 꺾어 주는 것뿐이다. 뒷날 대기병(對騎兵) 전술이 정교하게 발전될 때까지 보졸들만으로는 철갑으로 몸을 감싼 기마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기마대에 섞여 사수(5水)를 건너던 조구는 앞장선 초나라 보졸들이 한나라 기마대에 쫓겨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을 보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발밑의 얼음 두께를 따질 겨를도 없이 자신이 먼저 말 등 위로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모두 말 위에 올라라! 어서 가서 적의 기마대를 맞자.”

그러자 다른 장졸들도 분분히 말에 올라 박차를 찼다. 처음 한동안은 그래도 얼음이 견뎌 내는 듯했다. 하지만 수백 필의 기마가 속도까지 얻자 동짓달 얼음으로는 그 무게를 견뎌 내지 못했다. 초나라 기마대가 사수를 다 건너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얼음이 깨어지고 말과 사람이 아울러 얼음장처럼 차가운 강물 속으로 잠겼다.

다행히도 앞장서 있던 조구는 사마흔, 동예와 더불어 강물 속에 처박히지 않고 사수 동쪽에 내려설 수 있었다. 몇몇 기병들도 무사히 그들 뒤를 따랐으나 그 수는 그리 많지 못했다. 기마대 태반은 아직도 차가운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와 말과 사람이 아울러 지른 비명이 그러잖아도 한나라 기마대에 몰리고 있는 초나라 보졸들을 더욱 겁먹고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한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질 판이었다. 조구가 물속에 빠진 기마대를 기다릴 틈도 없이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모두 앞으로! 적의 기마부터 막아라.”

그리고 앞장서 내닫더니 저희 보졸 사이에 뛰어든 한나라 기사(騎士) 하나를 베어 넘기며 소리쳤다.

“모두 겁내지 마라. 내가 왔다. 죽기로 싸우면 절로 살길이 열릴 것이다!”

그런 조구에게는 보잘것없는 곳에서 몸을 일으켰으나 스스로 갈고 다듬어 이룩한 맹사(猛士)의 기개와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싸움이 기개와 풍모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미 한번 꺾인 기세인 데다 군사의 머릿수까지 턱없이 모자랐다. 오래잖아 얼음 물속에서 기어 나온 초나라 기마대까지 힘을 합쳤지만 이미 기운 전세를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한신이 조나라와의 싸움에서 위력을 보여 준 배수진(背水陣)의 원리와는 달리 조구가 이끈 초나라 군사들에게는 물을 등졌다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달아날 길조차 없다는 아득한 절망감이 되어 전의(戰意)를 꺾어 놓았다. 따라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살길을 찾아 달아나는 군사가 생기자 초나라 군사들은 그대로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다해 무너지는 전열을 가다듬던 조구도 마침내는 일이 글러 버린 것을 깨달았다. 사마흔과 동예를 불러 남은 전력(戰力)을 원진(圓陣)으로 뭉친 뒤 사수를 따라가며 싸웠다. 물이 얕고 얼음이 두꺼운 곳을 찾아 물러날 길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신이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더욱 세차게 한군을 휘몰아 물러날 길을 찾는 초나라 군사들의 삼면(三面)을 두텁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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