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속의 오늘]1931년 만보산 사건 발생

  • 입력 2005년 7월 2일 03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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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吉林) 성 창춘(長春) 현.

“우와∼” 하는 중국 농민 수백 명의 함성이 들려왔다.

“헐어내라!”

“아니 이놈들, 남이 애써 만든 물길을!”

이윽고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의 육탄전이 벌어졌다. 4월, 조선 농민 38가구가 이 지역으로 이주해온 뒤 쑹화(松花)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를 시작하자 인근의 중국인 농민들이 “공사 때문에 콩밭이 망가지고 땅에 물이 찬다”며 항의했다.

7월 1일부터 조선인들과 승강이를 벌이던 중국인들은 이날 마침내 힘으로 공사를 저지하려 했다. 갑자기 ‘탕 타당…’ 하고 총성이 울려 퍼졌다. 중국 농민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치기 바빴다. 일본 경찰이 ‘조선인도 일본 국민’이라며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 아래 중국 농민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이다. 이른바 ‘만보산(萬寶山) 사건’의 시발이었다.

이날의 충돌은 인명 피해 없이 지나갔지만 문제는 다음날부터였다. 마침 ‘만주로 건너간 조선 농민들이 중국 관헌들에게 박해를 당한다’는 입소문이 꼬리를 물던 즈음이었다. 3일부터 서울 인천 등 조선의 주요 도시에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포목점과 음식점 등이 불타기 시작했다.

유독 평양에서 피해가 컸다. 인천의 1700여 명보다 훨씬 적은 779명의 화교가 평양에 살고 있었지만 이즈음 살해당한 122명의 화교 중 94명이 평양에 살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트럭 한 대가 수십 명의 사람을 태우고 폭동을 선동하며 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경찰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7월 7일, 동아일보는 ‘이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동포여, 우리가 조선에 와 있는 중국사람 8만 명에게 하는 일은 곧 중국에 있는 100만 명 우리 동포에게 돌아옴을 명심하십시오. 즉시로 그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을 중지하십시오.”

사태가 가라앉은 뒤인 7월 18일, 중국 국민당은 성명을 냈다. “만보산 사건은 일본의 계획적인 음모에 의한 것이고 조선인들의 국내 폭거도 일본의 사주에 의한 것이다.”

일본은 무엇을 노린 것일까. 두 달 뒤인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 침공에 들어갔다. ‘중국 내 일본 국민의 신변이 위협받고 있어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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