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67>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26일 0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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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아니 됩니다. 적진이 성벽에 너무 바짝 붙어 있어 자칫하면 적의 또 다른 계략에 말려들 수 있습니다. 거짓으로 성을 치는 척하다가 갑작스레 강습으로 전환하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고단하더라도 매번 있는 힘을 다해 적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장량이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한왕의 말을 받았다. 한왕도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천근 무게에 짓눌린 것처럼이나 무거워졌다.

“오창(敖倉)으로 이어지는 용도(甬道)가 끊어져 군량도 넉넉지 못한데 이제는 몸까지 고단하게 되었구나! 이 형양성이 얼마나 버텨 낼지 실로 걱정이오.”

그렇게 말하면서도 장량의 말을 따랐다. 한왕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패왕과 범증이 노리는 바를 일러주고 초군의 움직임이 속임수로 보일지라도 경계를 늦추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장수들은 그런 한왕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사졸들은 달랐다. 초나라 군사들이 같은 짓을 하루 더 되풀이하자 자기들도 다 알겠다는 듯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뭐야? 누굴 놀리는 거야? 성벽 위로 기어오를 것도 아니면서 웬 난리야?”

“또 그 짓이군. 덤비지도 못하면서 고함만 질러대 어쩌겠다는 거야?”

그리고 사흘째부터는 아예 무시해 버렸다. 초군이 아무리 성벽 가까이 다가와 금방이라도 기어오르는 시늉을 해도 한군 사졸들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장수와 군리(軍吏)들이 번갈아 사졸들 사이를 돌며 싸울 채비를 다그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바로 그날 밤 기어이 한군은 큰 낭패를 당하고야 말았다.

봄 2월이라고는 하나 차갑기 그지없는 밤기운에 어둠까지 짙은 삼경 무렵 또 전날 밤처럼 성벽 아래서 함성이 일었다. 한왕의 엄명을 받은 장수와 군리들이 저마다 사졸들 사이를 돌며 싸울 채비를 다그쳤으나 사졸들은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수와 군리들의 언성이 높아갈 무렵 갑자기 성가퀴를 넘어서는 그림자가 있었다.

“초나라 군사다. 초나라 군사가 성벽을 기어올라 왔다!”

숨넘어가는 비명소리와 함께 그와 같이 놀란 외침소리가 들렸다. 이어 성벽 여기저기서 더 많은 불길한 술렁거림과 비명이 들리고서야 한군 사졸들도 비로소 큰일이 터진 줄 알았다. 그제야 놀라 창칼을 집어 들고 초군을 맞아 싸우기 시작했으나, 어느새 성벽 위는 잇따라 구름사다리를 오른 초군들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마침 형양성 안에는 주발과 하후영 주가 기신 등 패현에서부터 따라온 장수들과 역상 근흡(근(섭,흡)) 종공(從公) 같은 역전의 맹장들이 남아 있었다. 또 한왕(韓王) 신(信)과 사로잡혀온 위표(魏豹)도 장수들과 함께 사졸들을 다스렸다. 그들이 앞장서서 사졸들을 목 베어 가며 다그쳐서야 성벽 위로 올라온 수백 명의 초나라 장졸을 겨우 물리칠 수 있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위태로운 고비는 넘겼지만, 이튿날부터 말 그대로 고달픈 한군의 농성전(籠城戰)이 시작되었다. 형양성 안의 한군들은 뻔히 속임수인줄 알면서도 밤낮없이 이어지는 초군의 공세에 잠 한숨 편히 자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다가 날이 지날수록 성안의 양식까지 다해가 형양성은 점점 괴로운 지경으로 몰려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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