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피랍

  • 입력 2005년 5월 6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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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포로들은 몇 달 동안 준비한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포로수용소장이던 프랜시스 도드 미군 준장이 제76구역 수용소 앞에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포로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출입문을 열고 나온 한 무리의 포로들이 소리 없이 도드 준장을 에워쌌다. 도드 준장이 얘기를 끝내고 돌아서는 순간 포로들은 그를 철조망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 ‘포로들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한민족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총부리를 겨누던 시절. 거제 포로수용소는 또 다른 남북 대치의 현장이었다. 이곳에 수용된 17만 명의 공산군 포로들은 반공과 친공으로 편을 갈라 치열하게 싸웠다.

1951년 말 시작된 유엔군의 포로 송환 심사는 반공-친공 대립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휴전회담에서 북한은 포로 전원 송환을 주장한 반면 유엔 측은 자유송환 방식을 고수하며 포로들에게 송환 의사를 묻는 심사를 진행했다.

도드 준장을 납치한 이들은 친공 포로들이었다. 그들의 요구조건은 송환심사 철회. 자유의사를 물을 경우 북한과 중공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포로들이 절반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후임 수용소장으로 임명된 찰스 콜슨 준장이 철회 각서에 서명하고 나서야 도드 준장은 사흘 만에 풀려났다.

송환심사는 중단됐지만 포로들 간에 반목과 대립은 수위를 더해갔다.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가운데 통제권을 행사해야 할 유엔군사령부는 무관심했다. 유엔과 북한 간의 지루한 포로송환 협상을 거쳐 7만여 명의 공산군 포로들이 북한 또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휴전과 함께 거제 포로수용소도 폐쇄됐다. 남한과 북한을 모두 거부한 97명의 포로는 제3국행을 택했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공산군)

“중립국.”

“대한민국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국군)

“중립국.”

최인훈(崔仁勳)의 소설 ‘광장’(1960년)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의 회유를 모두 뿌리치고 제3국으로 향했다. 그가 이 땅에서 그토록 찾아 헤맨 ‘광장’은 이념 대립이 숨통을 조이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50여 년. 우리는 얼마나 넓고 윤택한 ‘광장’을 가꿔 왔는가.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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