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임치균교수 ‘소설속 소설’ 형식빌린 ‘검은바람’ 내놔

  • 입력 2005년 4월 5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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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만난 임치균 교수는 “요즘 TV드라마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들이 우리의 고소설에도 등장한다”면서 우리 고소설에 현대성을 가미하면 고스란히 드라마와 영화화 작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종승 기자
4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만난 임치균 교수는 “요즘 TV드라마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들이 우리의 고소설에도 등장한다”면서 우리 고소설에 현대성을 가미하면 고스란히 드라마와 영화화 작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종승 기자
때는 1600년 겨울. 다 떨어진 갓을 쓰고 해진 도포를 입은 젊은 선비가 한 아낙을 데리고 낙향해 칩거 중인 ‘나’(소설 속 주인공)를 찾아온다. 그리고 나는 그 선비를 통해 패설(소설)의 비밀에 한 걸음씩 접근한다.

김시습의 기전체 소설집 ‘금오신화’는 그저 기이한 이야기의 묶음이 아니라 그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양생이라는 선비가 귀신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룬 ‘만복사저포기’는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향한 충절과 그로 인해 이생에서 이미 불가능해진 자신의 꿈에 대한 애달픈 애환을 담고 있다. ‘나’는 ‘만복사저포기’를 읽고 백호 임제의 ‘원생몽유록’을 징검다리 삼아 17세기 기전체 소설로는 예외적으로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운영전’의 미스터리를 풀어간다.

유럽의 숨겨진 고전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낸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은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문학 교수의 ‘검은 바람’(태학사)이다. 이달 말 출간 예정인 이 작품에는 소설 속 소설의 형식으로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안평대군의 문인과 궁녀의 비극적 사랑을 담은 ‘운영전’이 현대적 한글로 전문 번역돼 있다.

“한국소설의 고전이라고 하면 춘향전과 홍길동전, 심청전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고소설(古小說)은 1000여 편에 이르고 그 소재나 내용은 오늘날에도 감탄을 자아낼 정돕니다. 대중에게 이를 전달할 방법으로 ‘소설 속 소설’을 생각해냈지요.”

임 교수는 고소설을 전공했지만 습작 외에는 소설을 써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난해 7월까지 미국에서 1년간 연구년을 보내면서 한국에는 과연 셰익스피어의 작품 같은 고전이 불가능한가라는 자문에 답하기 위해 ‘고전의 대중화’로서 이 같은 방법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만복사저포기’와 ‘운영전’을 현대적 감각의 한글로 번역하면서 문맥 상 필요한 곳에 지문을 삽입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또 애정소설로 알려진 ‘운영전’이 수양대군(세조)의 승리와 안평대군의 패배로 좌절된 문인정치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읽어내기도 했다.

그는 ‘권선징악’과 ‘해피엔드’로 폄훼되는 한국고소설의 구조에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삶에 대한 긍정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 TV드라마와 동일한 구조를 발견한다.

“한국의 고소설은 천편일률적이고 우연성이 남발된다는 편견이 있죠.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TV드라마에는 그런 요소가 없습니까. 한국의 고소설에는 오늘날 ‘한류(韓流)’의 근원이 되는 무수한 서사성이 숨어 있어요.”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차기 작품들이 줄지어 있다. 하나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작품을 보고 베꼈다고 기록해 학계에서 그의 원작이냐 중국 작품이냐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호질’의 작가가 누구인가를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가는 ‘소설 속 소설’이다. 또 하나는 가부장적 사회질서 속에서 남장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성적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 ‘방한림전’의 주인공을 조선시대 실제 인물로 각색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마치 망각의 사슬에 묶여 있던 우리 고소설들이 그를 영매 삼아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 같이 느껴진다. 과연 한국 고소설들이 새로운 고전이 될 날들이 올 것인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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