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9년 호메이니 이란 귀국

  • 입력 2005년 1월 31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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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트테이프. 1963년 필립스사가 이 작은 물건을 내놓았을 때 그것이 갖는 폭발력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존의 릴 테이프가 휴대와 장착에 불편하다는 사실에 착안한 필립스사는 테이프를 작은 플라스틱 상자에 넣었다. 이 작은 테이프는 갖고 다니기 편해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초에는 포터블 카세트 리코더가 등장해 젊은이들이 갖고 다니며 해변이나 길거리에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1979년 2월 1일, 이슬람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망명지인 파리를 떠나 이란의 테헤란 공항에 도착했다.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귀국 담화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동안 호메이니의 연설을 담은 카세트테이프가 밀반입돼 수백 수천 개씩 복사됐고, 이란 전역의 시위 현장에서 확성기로 틀어져 사람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했던 것이다.

앞서 1월 16일 망명길을 떠난 팔레비 전 국왕 본인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1941년 즉위한 그는 강력한 근대화 정책을 펴나갔다. 경제 성장률이 매년 9% 이상을 유지했고, 관개사업과 보건, 교육 사업으로 기근과 질병과 문맹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교분리로 기존 엘리트층인 성직자들의 권력 참여가 차단된 데다 그들의 지위마저 격하되자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은 분노했다.

1978년 1월 정부가 망명 중인 호메이니를 비판하자 시아파 성지인 쿰에서 항의시위가 발생했다.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호메이니의 육성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시위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2월 10일 ‘애도의 기념일’인 아슈라를 맞아 15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한 뒤 국면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났다. 호메이니만이 어떤 형태든 질서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란 혁명 이후 26년, 올해 탄생 42주년을 맞은 카세트테이프는 CD와 MP3 등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다. 문명비평가들은 “인터넷과 위성방송의 확산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전제정치는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예외가 있다면 사상검열로 무장한 북한 정도일까. 그러나 최근 탈북자들은 북한 지배층 사이에도 한국 가요와 드라마를 담은 카세트테이프가 은밀히 나돈다고 증언한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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