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8년 2차 석유파동

  • 입력 2004년 12월 16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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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2월 17일 알 오비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장은 “원유가격을 내년에 단계적으로 14.5%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제2차 석유파동의 시작이었다.

강경론을 주도한 나라는 리비아였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1969년 엑손모빌, 로열 더치 셸 등 선진국 거대 석유기업의 고압적 거래관행을 깨고 유가 인상을 관철시킨 ‘강골’이었다. 반면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을 주도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경제에 몰아닥칠 한파를 우려해 5%의 소폭 인상을 주장했다.

결론은 강경파의 승리였다. 미국은 “OPEC의 결정은 세계 인플레를 악화시킬 것”이라며 재고를 요청했지만 OPEC는 “유가 인상분을 선진국들이 수출품 가격에 반영하면 추가 인상을 단행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란이 ‘호메이니 혁명’의 혼란 탓에 원유 수출을 중단하자 유가는 1년 사이 3배로 급등했다.

인상폭은 1차 석유파동 때보다 작았지만 한국의 피해는 더 컸다. 1차 파동 때 한국은 산업화가 미진해 석유의존도가 낮았고 중동 건설 수주를 잇달아 따내면서 산유국들로부터 달러를 되레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 육성에 매진한 1970년대 후반에는 에너지 소비가 크게 늘었고 석유의존도도 1978년 63%에 달했다.

이에 따라 70년대 중반 8%대를 유지하던 경제성장률이 1980년 마이너스로 추락했다. 1980∼82년 물가상승률과 무역수지 적자 규모도 이전 3년간에 비해 16.7%포인트, 12억5000만 달러씩 증가했다. 유가 인상을 반영해 국내 기름값을 59% 올린 1979년 7월 서울시내 음식점 300곳이 문을 닫았다.

1, 2차 석유파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스라엘과 거대 석유기업에 대한 적의(敵意)로 촉발된 1차 석유파동은 산유국들에 ‘자원도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반면 가격 카르텔의 욕심을 드러낸 2차 석유파동은 산유국들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세계 경제의 동반 침체로 산유국들은 기대만큼 재미를 보지 못했고 석유소비국들은 옛 소련 등 비(非) OPEC 국가로 수입처를 옮기기 시작했다. 2차 석유파동은 OPEC의 전성기를 사실상 끝낸 자충수였던 셈이다.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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