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윤락행위방지법 공포

  • 입력 2004년 11월 8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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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성매매특별법(성매매 알선 등 처벌법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법)이 시행됐다. 같은 날 1961년 11월 9일부터 시행된 윤락행위방지법의 파란만장한 43년 ‘삶’도 끝났다.

당시 5·16군사쿠데타 세력은 사회악 일소 정책의 일환으로 이 법을 제정했다. 미 군정 시절인 1948년 제정된 ‘공창(公娼)제도 폐지령’을 새 법으로 대체한 것. 법 제정 이유는 ‘사회 이면에 만연돼 있는 윤락행위를 방지해 국민의 풍기 정화와 인권 존중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의 취지를 가장 먼저 무시한 쪽은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성매매 여성도, 하룻밤 쾌락을 찾던 남성들도 아니었다. 정부였다.

1962년 정부는 전국에 104개 ‘특정(성매매) 지역’의 설치를 사실상 허용했다. 법적으로는 48년 폐지된 공창을 부활시킨 셈.

주한미군 기지촌 주변의 유흥업소에 대해선 아예 면세 혜택이 주어졌다. 이른바 ‘양공주’가 외화 획득에 기여한다는 논리가 작용했다.

1972년 지역사회 정화 차원에서 문제의 특정 지역이 폐지됐다. 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여성학자들은 “70년대야말로 정부가 성매매를 정책적 관광사업으로 육성한 시대”라고 규정한다. 당시 고급 관광호텔에서 외국인을 상대하는 성매매 여성은 법적인 규제 대상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누렸다. 정부가 성매매 여성에 발급하는 ‘보건증’이 오히려 불법(성매매)을 허가하는 이율배반이 이루어졌다.

윤락행위방지법은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1월 5일 개정됐다. ‘윤락행위시 남자에 대한 처벌이 너무 약하다’는 여성계 여론이 반영됐다. ‘3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태료’로 바뀌었다. 당시 개정안을 마련한 보건복지부 부녀복지과에는 “하루저녁 외박한 남자를 전부 전과자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이 후로도 이 법은 정권의 필요에 따라 ‘철퇴’가 됐다가 ‘솜방망이’가 되는 요술을 부렸다. 갓 태어난 성매매특별법은 얼마나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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