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권혁범]자유주의가 부족하다

  • 입력 2004년 10월 5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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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출신의 미국학자가 지은 ‘가미카제’에 관한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도쿄(東京)제국대학 출신 500여명이 가미카제 특공대에 ‘자원’했다는 사실보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에 능통하고 동시에 동서양의 인문학 고전에 대한 이해 수준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니체에 심취한 자, 프랑스 소설에 심취한 자,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 반군국주의자들까지 있었다. 그러나 ‘일본제국’의 그 젊은 엘리트들은 자신의 ‘가미카제 결단’이 나라(일본)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들의 수기나 유서 발췌문을 통해 이를 확인하면서 어안이 벙벙했다. 고급 독해력과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이들도 결국 ‘국가’ ‘안보’의 성역 앞에서는 뇌 작동이 정지된 단순한 ‘모범생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눈앞에 현 한국사회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국가안보는 개인자유에 우선?▼

국가안보는 한국사회에서도 성역이 아닌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굳건한 안보’라는 이미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어떤 정파도 정치인도 공격에 취약해진다. 냉전체제의 해체와 남북한 화해협력 증진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항상 ‘튼튼한 안보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확고한 이미지를 심어줘야 하는 압력을 받는다. 안보는 정권과 관계없이 무조건 지켜내야 하는 절대적 가치라는 통념이 강하기 때문이다.

‘안보 없이 국가 없다’는 식의 담론은 국가주의 냄새를 짙게 풍기면서 안보 문제를 성역의 것으로 만든다. 안보 의식이 해이해지면 번영과 안정, 심지어 국가 자체가 붕괴할 것이라고 강박한다. 거기서 국가안보는 개인의 안전, 공동체의 안녕, 인권을 넘어서는 ‘특별한’ 것이고 동시에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안보를 위해서는 모든 다른 권리, 특히 집회 결사 사상의 자유에 관련된 권리는 유보될 수 있다는, 아니 유보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암시된다.

특히 자유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사람들이 주저 없이 국가, 안보, 국익, 국가정체성을 들고 나올 때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의 요체는 개인이며 그 개인의 권리와 생존이 다른 어떤 집단적인 가치에 우선한다는 인식체계이기 때문이다. 개인을 위해서 국가도 공동체도 안보도 모두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정치문화는 되레 자유주의적 언행을 억누른다. 개인이 국가보다 우선한다, 개인의 권리가 국가안보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순간 돌팔매를 맞지 않을까. 국가 안보와 자유 개인간의 복잡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대중적 공론에서 따져보는 일은 드물다. 안보란 모든 구성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의미인가, 아니면 거대한 국가담론이 항상 겨냥하는 어떤 정치적 이득을 은폐하는 개념인가.

안보담론이 과거 개발독재 시절에 정권 안보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것은 이제 잘 인지되어 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의 오늘의 안보 의식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그것은 특정한 집단, 계급, 성에 유리한 어떤 상태를 보편적인 것으로 호도하는 이념적 장치는 아닌가. 최근 국가안보 대신에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위험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안보라는 틀에 집착하는 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항상 유보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민주 정부 하에서 과거와 같이 안보를 빙자한 인권 침해가 거의 없다는 주장에는 바로 이런 권리의 유보가 인권침해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지 못한다.

▼개발독재시절의 유령 아닌가▼

민주화 17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가 반자유주의 정치문화를 털어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국가 국익 국방 국가안보에 관련해서는 여전히 구시대의 유령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잡고 있다. 그것에 대한 냉정한 검토와 도전은 ‘색깔론’이나 ‘국가위기’의 언어로 봉쇄되기 십상이다. 국제사회가 평균적으로 도달한 자유주의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면화된 국가안보주의 성역을 깨뜨리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는 자유주의가 여전히 너무 부족하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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