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5년 아데나워 첫 소련 방문

  • 입력 2004년 9월 7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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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독일은 뒤에서 보면 엉덩이가 두 개로 갈라져 있고, 앞에서 보면 늙수그레한 총리(아데나워)의 성기(性器)처럼 발기불능이야!”

다혈질과 거침없는 ‘입’으로 악명이 높았던 흐루시초프. 그는 걸핏하면 2차대전으로 두 동강 난 독일을 조롱하곤 했다.

1955년 9월 서독의 초대총리 아데나워가 국교 수립을 위해 그 흐루시초프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화해의 손을 내밀었으나 이내 앙금을 드러냈다.

흐루시초프는 나치 독일의 만행을 꾸짖었고 아데나워는 “붉은 군대도 못지 않게 잔혹행위를 저질렀다”고 거칠게 맞섰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아버지’ 콘라트 아데나워.

1949년 73세가 되어서야 권좌(權座)에 오른 ‘노회한 여우’는 소련을 혐오했다. 사회주의를 경멸했다.

그는 공산세력과 평화의 공존을 믿지 않았다.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그는 레닌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독일을 갖는 자가 유럽을 손에 넣는다….”

그는 철저하게 서방(西方)정책을 밀고나갔다. 서유럽 통합을 위해 프랑스와 화해에 온 힘을 쏟았다. 또한 이 ‘대서양주의자’에게 “미국의 신뢰를 잃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반면에 동구권을 싸늘하게 외면했으니 스탈린이 중립을 미끼로 던진 동서독 통일의 유혹을 뿌리쳤다.

서독의 총리가 아니라 ‘연합국의 총리’로 불렸던 아데나워.

그는 무엇보다 서독이 믿음직스럽게, 그리고 되돌릴 수 없게 굳건히 서유럽의 일원으로 자리 잡는 데 매진했다.

그 자신 “비스마르크의 장화는 내게 너무 크다”고 말했지만 두 사람의 업적은 곧잘 비견된다. 비스마르크는 수백 년간 분열 끝에 독일제국을 건설했고 아데나워는 전쟁의 폐허 위에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그의 퇴진으로 이어진 1962년 ‘슈피겔 사건’은 “분단을 감수하고라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꽃 피우고자 했던” 아데나워 시대의 아이러니였다.

아데나워는 슈피겔의 ‘폭로’에 질려 있었다. “국가 반역의 심연(深淵)”으로 단죄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가기밀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잡지의 편집장과 기자가 구속됐을 때 언론 자유를 위한 항거는 거셌다.

서독의 민주주의는 이미 개화(開花)하고 있었다.

독일은 라인강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고집 센 ‘뢴도르프의 영감’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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