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사라진 손바닥’…엄마 품 같은 詩

  • 입력 2004년 9월 3일 1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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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나희덕 지음/116쪽 6000원 문학과지성사

나희덕의 시는 착하다. 이 세상의 존재들이 천하고 귀하고 소중하고 하찮다는 경계와 구분이 없다. 시인은 오히려, 남들이 하찮고 모자라고 자질구레하다고 여기는 존재들을 다정다감한 손길로 쓰다듬는다.

‘밭에 가서 한 삽 깊이 떠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오래 묻혀 있던 돌멩이들이 깨어나고/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사금파리와 마른 뿌리들로 이루어진 말의 지층/빛에 마악 깨어난 세계가 하늘을 향해 봉긋하게 엎드려 있다/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 놓고 가 버렸으면/(중략)/오늘의 경작은/깊이 떠 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한 삽의 흙’)

해질 무렵 한 손에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산책을 간다는 시인이 어느 날, 흙을 한 삽 뜨며 길어 올렸을 이 시는 존재에 대한 선명한 온기와 사랑, 그러면서도 생을 바라보는 쓸쓸함과 서늘함이 꾸미지 않은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다섯 번째 시집을 낸 나희덕 시인. 등단 15년을 맞은 시인은 기존의 간명하고도 절제된 형식에다 세월의 깊이를 더해 견고하게 다져진 사유들을 펼쳐 놓는다. -사진제공 문학과지성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인 ‘사라진 손바닥’은 시인이 기왕에 보여 온 간명하고도 절제된 형식에다 등단 15년째라는 세월의 깊이를 더했다. 존재의 지층 아래에까지 보낸 시선이 더 견고하게 다져진 사유들로 결실을 보았다.

문학평론가 김진수씨는 해설을 통해 그의 시를 ‘모성적 따뜻함’이라고 말한다. “나희덕의 언어는 복합적인 삶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에서 기원한다. 그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혹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이분법적 도식 속에 삶의 복합성을 구겨 넣음으로써 그 어느 한쪽의 억압과 희생을 전제로 다른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태도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런 시적 태도는 여러 편의 시에서 목격된다.

책상 위에서 돌처럼 말라버린 석류와 탱자를 보고 ‘그들은 향기를 잃는 대신 영생을 얻었을지 모른다’라고 시작한 시인의 사유는 ‘싱싱한 꽃이나 열매를 보며 스스로의 습기에 부패되기 전에 그들을 장사지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때 이른 풍장의 습관으로 나를 이끌곤 했다/(중략)/달아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나는 건조증에라도 걸린 것일까’(‘풍장의 습관’)라는 내면의 성찰까지 이어진다.

전남 담양군 창평 어디쯤 방을 얻고 싶었던 시인이 집 주인으로부터 ‘지금은 빈 방이어도 우리 집안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라는 말을 듣고 돌아서면서 ‘빈 방을 마음으로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 들어 살기 시작했다’(‘방을 얻다’)고 읊조리는 대목에선 그녀의 훈훈한 마음자리에 문득,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시집 맨 앞에 적은 ‘작가의 말’에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 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라고 했다. 더 깊이, 더 뜨겁게,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생명들이 뿜어내는 한 줄기 광휘(光輝)에 주목하려는 다짐처럼 들린다.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힘겹게 파닥이고 있었다. 나는/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마른 물고기처럼’ 중)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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