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그 도시엔 '카프카-카사노바'의 향기가 난다

  • 입력 2004년 8월 13일 17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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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프라하/클라우스 바겐바흐 지음 김인순 옮김/147쪽 9500원 열린책들

◇카사노바의 베네치아/로타 뮐러 지음 이용숙 옮김/164쪽 9500원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 나오는 기괴한 캐릭터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는 눈에 보이는 풍경 대신 자신의 후각으로 세상을 재구성한다. 곳곳에서 날아온 냄새와 향기로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후각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카프카의 프라하’와 ‘카사노바의 베네치아’는 독일 바겐바흐 출판사의 기획 시리즈를 번역해 선뵈는 것이다. 이 시리즈가 표방한 것은 ‘작가와 도시 이야기’. 널리 알려진 한 도시를 행정구역과 지번이 아니라 거기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대표 작가의 사생활을 통해 재구성한 것이다. 밤의 산책을 통해 소설을 구상한 프란츠 카프카(1883∼1925)에게 체코의 프라하가 갖가지 몽상들을 잡아놓는 거미줄이었다면, 패륜아로 낙인 찍혀 후반생을 외지로 떠돌며 보낸 자코모 카사노바(1725∼1798)에게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끝없는 사랑의 변주곡을 추억하게 하는 손풍금과도 같은 곳이었다. 두 권의 책은 빨간 겉장을 넘기자마자 두 작가의 사생활이 배어든 도시 곳곳을 지도로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 수십장의 희귀 사진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 카프카의 프라하

마흔세살 노총각으로 숨진 이 작가가 각혈할 정도로 몸을 망친 데는 그와 두 번이나 약혼했지만 두 번 다 파혼으로 끝내버린 여인 펠리체 바우어가 한몫했다. 그가 그녀를 만난 것은 프라하 스코르제프카 거리의 우아한 벽돌집. 그곳은 카프카가 막 완성한 원고를 처음으로 보여주곤 했던 친구 막스 브로트가 살던 집이었다.

카프카는 거의 평생을 프라하 안에서 살았으며 산책을 즐겼다. 그는 500통이 넘는 편지를 바우어에게 보낸 후 그녀와 다시 약혼하는 데 성공했으며 일명 ‘황금 곤들매기’ 건물의 작은 방을 신혼방으로 구했지만 결과는 낙담 그 자체였다.

이 건물은 지금도 엘리베이터가 오갈 만큼 튼튼하지만 그가 구한 방만은 부실한 벽 탓에 바깥 소음들이 쥐처럼 오가곤 했다.

그는 결국 바우어와 헤어지고 난 다음 고요한 집필실을 찾아 ‘연금술사의 골목’에 있는 중세풍 집을 거쳐 쇤보르노바 궁전의 작은 방으로까지 옮겨간다.

그가 숨진 곳은 결핵 치료를 받던 오스트리아 빈 근처의 키얼링 요양소였지만 가족들은 그를 결국 프라하 슈트라슈니츠의 유대인 묘지에 묻었다. 그는 숨지기 전 좌절 속에 “모든 원고를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이를 무시한 친구 브로트 덕분에 장편 ‘심판’과 ‘성’, ‘아메리카’가 빛을 볼 수 있었다.

● 카사노바의 베네치아

단순 패륜아이자 ‘민법상 총각’으로 남을 뻔했던 카사노바를 ‘기억해둘 만한 문필가’이자 ‘성애(性愛)의 모험가’로 자리 잡게 한 것은 말년의 회상록 ‘내 인생 이야기’였다. 독자들은 이 글에서 베네치아의 운하와 골목길, 궁전과 광장, 수녀원과 카페들에서 그가 벌인 격투와 밀애를 읽게 된다.

그는 한 마리 물개처럼 베네치아의 물길들을 곤돌라를 타고 오갔으며, 길눈 좋은 경주마처럼 밤길을 내달릴 수 있었기에 이미 애인이 있는 여인들과 능란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대본 작업을 했던 그는 산 사무엘레 극장의 칸막이 관람석에서 밀애를 나눴다. 초 값을 아끼려 했던 극장주가 어두운 조명을 방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리도토 카지노에서 돈을 빌려줬던 귀부인들을 주데카 섬으로 데려가기도 했으며 산타주스티나 성당 수도원에서 두 명의 수녀를 동시에 애인으로 만들어 돈 조반니보다 더 저주 받을 바람둥이임을 입증했다.

어떤 여자에게도 미련을 두지 않았던 그가 진정 사랑했던 것은 유럽 어디를 떠돌든 영원한 북극성으로 남아 있던 베네치아였다. 젊은 시절 그를 ‘사랑의 오페라’의 주연으로 만들었던 무대였기 때문이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카프카?▼

카프카는 1883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이곳 왕립 카를 페르디난트대에서 독문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1906년 법학박사가 된 뒤 프라하 고등법원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듬해 보험회사에 입사해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줄곧 프라하의 보험 회사원으로 일했다. 그는 펠리체 바우어와 두 번째 파혼하고 2년 뒤인 1919년 율리에 보리체크와 약혼하지만 그마저 결별로 끝나버렸다. 그는 옛 연인들과의 추억이 깃든 프라하에 머무는 것을 몸서리치곤 했다. 슬로바키아와 독일 베를린 등지의 요양소를 돌아다녔으나 결국 1925년 오스트리아 빈 인근에서 숨졌다.

▼카사노바?▼

카사노바는 1725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하급 성직자로서 축성을 받았으며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천성적으로 음악과 모험 연애를 즐기고 권위적인 것에 야유를 보낸 그의 태도는 권력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는 국가종교재판소의 판결로 1756년을 비롯해 두 차례 ‘납지붕 감옥’에 갇혔으며 그때마다 탈옥해 결국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떠나있어야 했다. 그는 1783년 몰래 베네치아로 숨어들어와 잠시 시내를 살펴봤다. 그는 2년 후에는 보헤미아 지방 둑스 성의 발트슈타인 백작 사서로 임용됐으며 1798년 숨질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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