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2년 작가 헤르만 헤세 사망

  • 입력 2004년 8월 8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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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심성(心性)은 이름이 다를 뿐이지 같은 길을 간다….”(노발리스)

‘황야의 이리’(1927년) 헤르만 헤세. 그의 마음속에는 늘 야릇한 충동이 맴돌았다. “발은 언제나 얼음처럼 차가운 반면 머릿속은 불타는 것 같았다.”

헤세는 선교사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에게서 기독교적 경건함을 혈통으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열네 살 되던 해 12월, 폭설이 쏟아지던 어느 날 밤 그는 수도원을 도망치고 말았다. ‘수레바퀴 밑에서’(1906년) 영원으로 탈출했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마법(魔法)이 필요했다!”

전생(前生)이 ‘히말라야 산중의 은둔자’였다는 헤세. 그에게는 하나의 뚜렷한 징조(徵兆)가 싹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오직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마음의 근원으로 향하였다. 자아와 신(神)이 만나는 ‘마술적 체험’을 갈구했다.

헤세는 나이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작가의 명함을 내밀었다.

그가 익명으로 발표한 ‘데미안’(1919년)은 전후(戰後) 젊은이들의 바이블이 되었다. 그는 ‘히피들의 성자(聖者)’였다.

젊은 날의 방황은 통과의례처럼 헤세의 정신적 세례를 거쳐야 했으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사랑과 슬픔, 방랑과 우울, 그리움과 상실…. 표현주의적 시대상황 속에서 서정적인 언어로 건져 올린 영혼의 메시지에 그들은 매료됐다.

헤세는 1차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아버지와 자식의 죽음, 아내의 정신질환을 지켜보았다. 평화와 반전운동에 나섰던 그는 조국을 배반한 작가로 낙인찍힌다.

그는 전쟁으로 흐트러진 세상과 문명의 난폭성을 절망 속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야만과 무질서는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는 시대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토마스 만)

젊은 날의 부처인 ‘싯다르타’(1922년)는 영원한 변화와 통일의 상징인 물을 통해 우주만물의 전일성(全一性)을 투시하고 있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년)라는 극단의 두 인간형은 대립성 너머에 존재하는 궁극의 조화를 찾고 있었다.

그는 대자연의 ‘초안(草案)’인 인간을 다시 그리고자 했다.

헤세는 시도이며 변화였다. 그는 자연과 정신 사이에 놓인 좁고도 위험한 다리였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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