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현 정권 정체성이 문제의 핵심이다

  • 입력 2004년 7월 27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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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정체성 공방을 보면 지금 대한민국의 시계는 도대체 몇 시인지 자문(自問)하게 된다. 앞만 보고 뛰어도 우리 세대에 과연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데 눈만 뜨면 과거를 붙들고 싸우니 “국민 노릇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다.

현 정권의 정체성에 대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질의에 청와대가 답을 내놓았지만 핵심을 비켜 갔을 뿐 아니라 문제를 더 키웠다고 본다. 박 대표는 구체적 현안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을 물었다. 대통령 직속인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가 미전향 장기수를 민주화에 기여한 사람으로 판정하고, 간첩 혐의로 복역한 사람이 의문사위 조사관이 돼 현역 장성을 조사했는데 대통령의 입장은 뭐냐고 물은 것이다.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했는데도 북한에는 말 한마디 못하고 왜 우리 군만 질책하느냐고 따진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이 정권의 정체성은 과연 뭔지 밝히라고 요구한 것이다. 박 대표가 아니더라도 국민이라면 누구나 물을 수 있고, 또 물어야 할 문제들이다.

이에 대한 노 대통령의 답은 “헌법에 담긴 사상이 내 사상인데, 다만 그 헌법은 유신(維新) 헌법이 아니라 1987년 10월에 개정된 민주헌법”이라는 것이 전부다. 적절하다고 보기 어려운 답변이다. 박 대표나 다수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은 현 정권의 정체성이다. ‘좌편향 정권’이라는 얘기가 자꾸 나오고, 불안해서 기업들은 투자를 꺼리고 일부 부유층은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다는 말까지 나오니 정체성을 분명히 해서 국민을 안심시켜 달라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 소모적인 체제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아닌 오늘의 현실에 대한 대통령의 진단과 처방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청와대는 “대통령은 취임 이후 가는 곳마다 자유민주주의를 얘기했고, 투명한 선진 시장경제를 얘기했다”고 반박했지만 문제는 상당수 국민이 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오죽하면 경제담당 부총리가 “우리가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지 요즘 들어 의문이 든다”고 자탄(自歎)까지 했겠는가.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분명한 답을 줬어야 한다. ‘유신’ 운운하면서 과거로 돌아갈 일이 아니다. 유신 치하의 개발독재 논리로 정권의 정체성을 재단하지 말라는 뜻이었겠지만 그런 식으로는 논쟁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전선(戰線)만 확대시킬 뿐이다. 벌써 야당에선 “대통령 자신이 DJP연합이었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지 않나”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지 않는가. 이래서는 한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이 정권의 관심은 온통 과거사 들추기에 쏠려 있다”는 지적들이 나오는 판이다.

국민이 정권의 정체성에 불안감을 느낀다면 이를 해소할 책임은 일차적으로 대통령에게 있다. 야당과의 철 지난 유신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충실한 대통령임을 실천으로 보여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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