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 입력 2004년 6월 9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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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그 호시절(?)에 남산의 ‘중정(中情)’ 부장실에서 바라보면 북악산 기슭의 청와대가 한눈에 보였다.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던가.

김종필 김형욱 김계원 이후락 김재규….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간판을 바꿔달기까지, 박정희 집권 18년간 ‘남산의 부장’들은 북악산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선우후락(先憂後樂)?’ 먼저 고민하고 나중에 즐거워한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 공안조사청의 이 ‘청훈(廳訓)’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으니.

1971년 대선에서 패한 김대중 후보는 이후락 부장에게 말했다. “나는 박정희 후보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 부장 당신에게 졌소!”

당시 중정은 거국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중정은 1961년 6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발족했다. 김종필의 작품이었다.

중정 최초의 야심작은 ‘4대 의혹사건.’ 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을 통해 5·16군사정변 세력의 정치자금을 긁어모았다.

이후 중정은 ‘국정 운영 전반에 걸쳐 대통령을 보좌하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불법이었다.

유신 치하 ‘용공(容共) 조작’은 공작정치의 극치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끌려간 반체제 인사들은 졸지에 간첩으로 둔갑했다. “고문을 하면 결국 시키는 대로 다 불었다….”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불과 20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사법적 살인’이었다.

‘유럽 거점 간첩단’으로 옭아매려고 했던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는 죽어서야 남산의 지하벙커를 나올 수 있었다.

오랜 군부 통치가 막을 내린 뒤, 이 태생적으로 권력 지향적인 집단은 희한한 행태를 보인다. 기관에서 수집한 정보를 이용해 정치권과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유력한 대권후보에 줄을 대고자 함이었다.

신물 나는 ‘폭로정치’는 그 소산이다. 국가기밀을 입에 물고 ‘권력의 강’을 헤엄치는 스파이의 꼬락서니라니.

이들은 미 중앙정보국(CIA)의 ‘국훈(局訓)’을 자의로 해석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진리(정보)를 알진대, 진리(정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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