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달의 제단’…엄한 조부-튀는 장손

  • 입력 2004년 5월 28일 17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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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심윤경 지음/282쪽 9000원 문이당

2002년 유년의 기록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종가의 위상을 지키려는 엄한 할아버지와 전통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손자가 긴장과 갈등, 충돌과 파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정밀한 문장으로 그려냈다. 과거에는 흔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희귀해진 소재를 잡아 신구 세대의 대립을 드라마틱하게 들려주고 있다.

작가 심윤경씨(32)는 아이를 키우고 있는 주부다. 그러나 군에서 제대한 서안 조씨 가문의 장손 조상룡을 소설 속의 내레이터인 ‘나’로 내세우는 ‘성 전환 작업’에서 능란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나, 조상룡’은 군역에서 돌아오자마자 향불을 피우고 조상에게 출입고(出入告)를 치른다. 내가 군에 있을 동안 할아버지는 선조의 봉분을 옮기다가 나의 10대 조모가 되는 안동 김씨 소산할매의 내간(內簡)을 발견하는데 내가 국문과 학생이라는 이유로 해독해 보라고 맡긴다. 내간의 뜻을 새기다 보면 가문에 대한 신뢰와 종손으로서 자긍심이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서자로 자랐다. 예전에 할아버지는 종부(宗婦)의 격에 맞는 풍산 유씨 가문의 규수 해월당 유씨를 며느리로 낙점하지만 서울에서 학교를 마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미모의 중학교 미술교사와 결혼하고 만다.

그러나 아버지는 해월당 유씨와 강제로 재혼한 후에 자살하고 마는데, 이 때문에 나는 결국 17대 종손이 돼버린 것이다. 나는 생모의 손을 떠나 해월당 유씨 아래서 자라는데 서자로서 그늘진 자의식을 쌓으며 시퍼런 청춘을 맞는다.

한편 내간의 해독에 나선 나는 할아버지의 기대와는 엇나가는 과거의 현실들과 만나고 만다. 판서를 지냈던 14대조 원찬 할배가 집안의 ‘아랫것’에 흑심을 품게 된 후에 그녀의 정인(情人)을 때려 죽게 하는 일이 나온 것이다.

엇비슷한 일이 현실에서도 진행된다. 나는 행랑어멈의 딸이자 동갑내기인 ‘정실’과 사귀면서 서자인 자신의 처지와 다리가 성치 못한 그녀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정실과 육체적 사랑에 빠지게 됐음을 알게 된 할아버지는 정실의 어머니가 보는 가운데 그녀를 먼 곳으로 끌고 가 버리고 만다.

작가는 최근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일본인이 썼는지, 한국인이 썼는지 분간되지 않는 몇몇 ‘쿨한 소설’들에서 모욕감과 같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고 밝혔다. 작가는 의고투 내간체 문장을 능숙하게 되살리면서 ‘쿨한 소설’들의 대척점에 자발적으로 섰다. 그리고 예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려 주고 있다. 신구(新舊)의 갈림길에 위태롭게 선 우리 신세대 문학에서 일찍이 볼 수 없던 새로운 면모의 작품이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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