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상가(喪家)에…’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게 삶…

  • 입력 2004년 5월 14일 17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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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유홍준 지음/120쪽 6000원 실천문학사

1998년 데뷔한 젊은 시인 유홍준의 첫 시집이다.

대체로 좋은 시들은 읽는 이들에게 첫 라인을 수평선처럼 그어놓는 어떤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 깨달음 놀라움 흥겨움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지만 결국 몸과 감각에 물살을 만들어내는 감동을 지니고 있다. ‘감동’이란 말과 현대시를 별개의 존재로 알고 있는 독자들이 없지 않은데, 그건 괜한 선험적 판단이다. 시는 감동이다. 그것이 지적인 데서 나왔든, 서정적인 데서 나왔든 시는 감동이다.

유홍준 시들에 대해 어떤 이는 삶의 치욕을 너무 일찍 보아 버린 육체와 영혼이 해부학 실험실의 뜨겁고 흥건한 죽음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한다. 너무 소멸지향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어둡고 칙칙하게 갇혀 있지만은 않다. 여기에 그의 시가 지니는 맛과 개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시인 ‘喪家에 모인 구두들’이 왜 이토록 밝고 친숙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이 시는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아무리 단정히 벗어 놓아도/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젠장, 구두가 구두를/짓밟는 게 삶이다/밟히지 않는 건 亡者(망자)의 신발뿐이다’로 시작한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北天(북천)에 새로 생긴 신발 자리 별 몇 개’로 끝난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그 첫 라인으로 두려움과 어두움의 대상인 죽음이 오히려 일상의 한 풍경으로 수평선을 긋는다. 그 친화의 이미지는 문상객을 대유(代喩)하고 있는 구두들에서 나온다. 또한 어수선한 상갓집 현관의 비속한 풍경과, 다음에 이어지는 개탄의 소리 ‘젠장’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데서도 나타난다. 그러한 맛을 내게 하는 시인의 솜씨가 만만치 않다.

그 다음 이어지는 ‘구두가 구두를/짓밟는 게 삶이다/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같은 개탄도 잘 맞아떨어진다. 구두들의 풍경에서 끌어낸 그럴싸한 이미지 아닌가. 시인은 그런 발견을 하나의 경구 형태로 써놓아 자못 세상을 꾸짖고 있는데, 읽는 이로 하여금 슬며시 미소 짓게 한다.

이 시의 마무리 또한 죽음이라는 엄숙한 풍경을 해학적인 여유로 바꿔놓고 있다. 밤 새워 화투라도 했으리라. 오줌 누는 풍경이 다시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로 상승한다. 초월 공간을 빚어낸다. 그것도 ‘신발자리’다. 이러한 의식과 표현의 시적 운용은 유홍준 시의 한 패턴을 이룬다.

이 시집의 ‘자루 이야기’ ‘노란 주전자’ ‘자전거 체인에 관한 기억’과 같은 시들은 삶의 치욕, 그 상처의 흔적들로 이어져 있지만 구성과 표현은 결코 굳어있지 않다. ‘자루’라는 상징어를 따라가노라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웃음이 나온다. 밝음과 어두움을 삶의 실체로 동시에 수용할 줄 아는 초월적 통합 의지가 보인다.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한 모습이다.

정진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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