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미녀와 야수

  • 입력 2004년 5월 13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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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이 틀린 답을 말하면 ‘을’은 전기쇼크를 줘야 하는 실험이 있었다. 틀릴수록 쇼크 강도는 높아진다. 갑이 울부짖으며 그만하자고 할 정도였다. 을은 괴로워하면서도 실험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을의 역할로 참여한 사람 중 매뉴얼대로 최고치까지 전기 스위치를 올린 이가 65%였다. 40년 전 미국 예일대학에서 벌어진 이 실험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든지 남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음을 증명한 고전적 예로 꼽힌다.

▷“나는 상관의 명령대로 사진 포즈를 취했다.”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이라크 포로 성고문 사진의 가해자 여주인공 린디 잉글랜드 일병은 미국 한 지역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아지 한번 괴롭힌 적 없다는 이 스물한살의 아가씨는 “그런 일은 전쟁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독일 나치정권 시절 민간인 수백만명을 죽이고도 별다른 죄의식 없이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던 아돌프 아이히만이나, 베트남전 때 밀라이촌 양민을 고의학살한 데 대해 같은 주장을 한 윌리엄 캘리 중위를 다시 보는 것 같다.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인데 어째서 잔인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는지에 대한 실험은 또 있다. 1971년 스탠퍼드대학에서 실험자를 둘로 갈라 한쪽은 간수 역을, 한쪽은 죄수 역을 시켰더니 간수는 죄수의 옷을 벗기고 성적 모욕을 하는 등 ‘실제상황’처럼 살벌해지더라는 거다.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양상이다. 강자와 약자, 위아래가 명확한 사회에선 통제와 감시만 없으면 강자는 얼마든지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다.

▷동화의 세계엔 미녀와 야수가 따로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미녀 속에도 야수가 들어 있다. 여건만 된다면 야수성은 언제든지 폭발한다. 그렇다고 상황 탓만 하는 것도 위험하다. 책임질 자가 없기 때문이다. 멀쩡하던 사람도 명령에 따라, 칭찬을 기대하며, 구국의 사명감에 젖어 야수로 돌변한다. 그러나 상황과 인간을 그렇게 만든 건 바로 리더십이다. 착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야수성을 드러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리더의 일이다. 그런 리더를 만나는 건 조직원의 복이고.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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