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447년 안견 몽유도원도 완성

  • 입력 2004년 4월 22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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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의 원형을 일구어 냈다는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도원(桃源)’이라는 중국문화의 이상향을 ‘몽유(夢遊)’를 통해 재해석한 조선 전기의 대표작이다. 북송(北宋)시대 산수화의 대가 곽희의 화풍을 따랐다고는 하나 ‘곽희 식으로 그리면 곽희가 되고, 이필 식으로 그리면 이필이 되었던’ 안견의 독특한 경지를 열었다.

유일하게 이론이 없는 그의 진작(眞作)이다.

세종 29년(1447년) 4월의 어느 봄날, 안평대군에게서 꿈에서 거닐었다는 도원의 이야기를 듣고 사흘 만에 그려냈다.

당대의 명필이자 문장가였던 안평 외에도 정인지 박팽년 성삼문 이개 신숙주 서거정 김종서 등이 자필로 찬시(讚詩)를 썼다. 가히 조선 예술사에 빛나는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시편이 당대 명사들의 시국관과 정치적 이상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왕자 안평의 ‘도원몽(桃源夢)’을 현실세계에 도원의 낙토(樂土)를 ‘옮겨 심는’ 상서로운 조짐으로 보았다.

시절은 적자(嫡子)의 왕위계승이 흔들리던 국초(國初)였으니, 그들이 도원몽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읽었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장차 안평으로 인해 올지도 모르는 ‘도원의 세상’을 꿈꾸었음인가.

실제로 이들 찬시는 훗날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의 화근(禍根)이 되었고, 안평은 물론이요 사육신 등이 참살을 당하거나 사약을 받았다.

그러나 도원몽의 정치적 해석을 극구 경계했던 신숙주는 왕위 찬탈에 가담해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한다.

정작 그림을 그린 안견도 정변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안평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나 진즉 시세의 역류(逆流)를 간파했다. 안평의 벼루를 훔쳐 그와 의절했음을 수양대군에게 알리고 스스로를 구명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세상사 덧없음이여! 역시 계유정난 때 목숨을 잃은 이현로는 이 모든 것을 예견이라도 하듯 찬시에 이렇게 읊었다.

“세속의 공교(工巧)함을 돌아보니/이득과 명예를 좇아 서로 애태우네/백골이 세월 따라 분주히 서로 달리고/슬픔과 즐거움이 뒤섞여 오장(五臟)을 치는구나….”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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