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훈/정치인 약속은 ‘연애편지’ 수준?

  • 입력 2004년 3월 22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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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의원총회가 열린 22일 오전 11시반경 국회 145호 회의실 앞.

의총에서 의원직 사퇴 철회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진 지 2시간반이 지났을 즈음 유시민(柳時敏) 의원이 잠시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회의장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사퇴를 번복하면 정치인 말 뒤집기에 대한 비판이 많을 텐데요” 등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유 의원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여러분 연애편지 안 써 봤어요. 밤새 연애편지 썼다가 아침에 읽어 봐서 유치하면 찢어버리는 것 아니에요. 화가 나서 항의 표시로 한 일인데 국민한테 ‘상황이 달라졌으니 죄송하다’ 한마디면 끝날 일 갖고 왜 이런 고민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어 그는 “젊은 사람들은 안 그러는데 오히려 노인네들이 그런다(사퇴 철회에 반대한다)”며 회의장 안으로 사라졌다.

의총이 끝나자 김근태(金槿泰) 원내대표 등 의원 4명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카메라 앞에서 큰절부터 올렸다. 김 대표는 “국민 여러분의 꾸지람을 달게 받겠다”고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김부겸(金富謙) 원내부대표는 이례적으로 의원 개개인의 발언을 상세히 브리핑했다.

브리핑에 따르면 유 의원은 의총에서도 “사퇴 철회 하려면 분명히 사과하고 사퇴철회를 안 할 거면 선언해야 한다. 국민의 비판은 2, 3일이면 종결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유 의원의 이날 언동을 지켜보면서 떠오른 것은 대통령 탄핵안 통과를 저지하다 국회 경위들에게 끌려나와 울부짖던 모습이었다. 당시 유 의원을 포함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더러운 배지를 단 한순간도 달고 싶지 않다”며 의원직 사퇴를 결의했다.

이날 열린우리당이 방침을 바꾼 솔직한 이유는 국고보조금이란 ‘떡’과 기호 3번의 프리미엄을 버리기 아깝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정이 바뀌면 약속을 어길 수 있다는 점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열흘 전 ‘대국민 약속’을 ‘2, 3일이면 잊혀질 연애편지’로 비하하는 유 의원의 태도는 아무래도 국민을 경시하는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이 훈 정치부 기자 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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