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65년 흥선대원군 서원에 ‘철퇴’

  • 입력 2004년 3월 8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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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군 화양계곡은 가히 한 폭의 진경(珍景)이다.

백두대간의 허리를 떠받치듯 솟구쳐 오른 준봉(峻峯)이 산자락에 거울처럼 맑은 계류(溪流)를 품고 있어 “금강산 이남에서는 으뜸가는 산수”(이중환 ‘택리지’)라는 찬탄을 샀다.

이곳의 절경은 조선중기 성리학자이자 노론의 거두였던 우암 송시열이 은거(隱居)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가 죽은 뒤 그를 배향한 화양서원이 세워졌는데 그 위세가 조선 팔도에 떨쳤다. 인근에 명나라 신종의 위패를 모신(?) 만동묘가 있는 탓이었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렸다.

흥선대원군도 파락호 시절 이곳에 들렀다가 패대기질을 당했다. 입구에서 통행세를 내기를 거부한 까닭이었다. 서원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낀 그는 신음을 토했다. “과연 서원이 왕실 위에 있구나!”

본시 서원은 도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대부의 도량(道場)이었다.

세상의 번롱(飜弄)에서 벗어나 사물의 근원과 이치를 궁구했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하는 물리적 표상이었다.

그래서 조선조 서원은 관립교육기관인 향교와는 달리 한적하고 외진 곳에 터를 잡았다. 풍광이 좋은 곳에 서원이 있었고 주변엔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사시사철 그 푸른빛을 거두어들이는 법이 없는 소나무는 선비들의 기개와 순일(純一)한 지조를 상징했다.

조선조 최초의 서원이었던 ‘소수(紹修)서원’의 이름엔 “늘 스스로를 성찰하고 시대를 고민한다”는 뜻을 담았다.

그러나 서서히 이끼가 끼고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교육과 학문의 전당은 붕당(朋黨)과 당쟁의 소굴로 변해갔다. 정치세력에 기생하려는 양반유생들이 들끓었다.

면세와 군역을 기피하는 특권을 누리면서 백성에 대한 수탈을 일삼았다. 원성이 자자했다. 오죽하면 “서민들의 가죽을 뚫고 골수를 빨아먹는 남방의 좀”(매천 황현)이라고 했을까.

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도둑놈 소굴’에 손을 보았다.

고종 즉위 이듬해인 1865년 3월. 자신에게 수모를 안겨준 화양서원과 만동묘에 첫 칼을 내려쳤고, 그 6년 뒤 전국에 700여곳을 헤아리던 서원은 47개만 남았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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