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제2의 '브라 전쟁'

  • 입력 2004년 1월 16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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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성의 가슴을 돋보이게 해 주는 나라는 어디일까. 두 달 전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불붙은 무역분쟁을 들여다보면 정답은 중국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지난해 11월 미국이 중국산 브래지어 니트 잠옷에 대해 쿼터 적용 방침을 밝히자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며 발끈한 것이다. 이름 하여 ‘브라 전쟁’이다.

▷섬유제품은 머리나 기술보다 사람 손에 의지하는 노동집약산업이다. 세계의 제조공장 중국에선 1500만명이 직접적으로, 1억명의 인구가 간접적으로 섬유산업에 매달리고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 브래지어의 대부분은 미국으로 수출된다. 브래지어는 특히 불황기에 잘 팔리는 묘한 특성이 있다. 여성들이 비싼 옷을 사는 건 참아도 새 속옷 하나쯤은 눈 딱 감고 사들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위무하기 위해서란다. 미국도 ‘고용 없는 성장’으로 체감경기가 썰렁한데 저렴한 브래지어마저 사기 힘들게 생겼으니 중국은 물론 미국 여성들도 신경을 곤두세울 판이다.

▷‘브라 전쟁’의 뒤에는 미국의 의류제조업체가 있다. 중국의 값싼 섬유제품이 미국 내 31만6000여개의 일자리를 잡아먹은 주범이라며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치판에 보호무역을 로비한 것이다. 처음엔 보복을 외쳤던 중국이 이번 주 초부터 미국과 협상을 시작했으나 이번엔 유럽의 섬유업체들이 들고 나섰다. 유럽 섬유협회인 유라텍스가 “계속 수입이 늘면 공장이 문 닫고 실업이 증가할 것”이라며 화학섬유의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촉구했다. 유럽과 중국간 제2의 ‘브라 전쟁’이 예고된 셈이다.

▷중국산 브래지어가 귀해지면 또 다른 나라의 값싼 브래지어가 등장하겠지만 내막은 브래지어 끈보다 복잡하다. 미국은 지난해 4468억달러나 되는 무역적자에 대해 ‘남의 탓’을 할 대상이 필요했고 이 중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은 좋은 제물로 다가왔다. EU 역시 중국이 화폐가치를 묶어둔 탓에 달러 값이 떨어지고 유로화가 치솟는다며 ‘중국 때리기’에 합세하고 있다. 약자엔 자유무역을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보호무역으로 회귀하고, 정책 잘못으로 인한 경제문제는 남 탓으로 돌리는 게 강자의 윤리인 모양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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