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시각장애인 위한 '소리잡지'녹음 성우 박태호

입력 2003-11-30 18:02수정 2009-09-28 04:4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지난달 25일 서울 강동구 상일동 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 녹음실에서 소리잡지를 녹음하고 있는 성우 박태호씨. 박씨는 올해로 출범 20년을 맞은 소리잡지의 창립 멤버다. -권주훈기자
“저희야 세상에 줄 수 있는 건 목소리뿐이죠.”

성우 박태호(朴泰鎬·56·MBC 라디오 ‘격동 50년’ 출연)씨는 21년째 서울 강동구 상일동 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02-440-5250)에 매달 ‘출근’한다. 시각장애인용 월간지 ‘소리잡지’의 녹음을 위해서다.

그가 창간 멤버의 한 사람인 ‘소리잡지’는 전문 성우들이 자원봉사로 ‘샘터’ ‘좋은 생각’ ‘리더스 다이제스트’ ‘소비자시대’ 등 4개 월간지 기사를 발췌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뒤 800여명의 장애인들에게 무료 배포하는 월간 매체다.

이 소리잡지는 9월 창간 20돌을 맞았다. “출발할 땐 30대 청년이었는데 50세가 넘어서까지 이어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박씨는 회상했다. 일반도서가 아닌 정기간행물을 녹음해 배포한 것은 국내에서는 소리잡지가 처음. 그 뒤 각종 단체에서 신문 또는 잡지를 녹음해 배포하는 서비스를 시작했고 시각장애인을 상대로 한 우편물에 한해 배송료를 면제해 주는 대통령령도 제정됐다.

전문 성우들이 녹음해 질이 높은 시각장애인용 음성매체는 지금도 흔치 않아 시각장애인들의 호응은 기대 이상이다. 점자로 된 ‘팬레터’가 매달 여러 통 쌓일 정도.

소리잡지는 고 이영달씨가 주도해 시작됐다. 이씨는 만화영화 ‘뽀빠이’의 악당 브루터스 목소리로 잘 알려진 성우. 당시 성우협회 간부였던 이씨가 재단측 부탁에 따라 뜻있는 후배 성우들을 모아서 이를 만든 것. 점자책은 몇 번만 돌려 읽어도 글자가 눌려 더 이상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대안매체가 절실하던 상황이었다. 현재는 120여명의 MBC방송 소속 성우들이 번갈아가며 녹음에 참여하고 있다.

전문 성우들을 한 달에 한 번씩 아무 사례도 없이 동원하기란 쉽지 않았다. 10명이 번갈아 해도 4시간이 넘게 걸리는 녹음을 이씨와 박씨 둘이서 목이 쉬도록 해낸 적도 있다.

“20년을 한결같이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선배의 공이죠. 소리잡지 녹음 일정이 잡히면 방송도 마다하고 재단으로 달려가곤 했으니까요.” 18년간 한 차례도 소리잡지 녹음에 빠지지 않던 이씨는 2001년 폐암 진단을 받고 이내 타계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자신의 안구를 기증해 시각장애인에게 빛을 선물했다.

박씨 등은 1년에 한 번 낭독 봉사를 희망하는 일반인들을 모아 교육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청각이 무척 민감해요. 게다가 귀가 유일한 통신수단이라 지루하지 않도록 빠른 속도로 또박또박 읽어야 하죠.” 박씨의 아들과 딸도 방학 때면 친구들까지 동원해 테이프 녹음을 돕는다.

“재능이 있어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 소리잡지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박씨는 “소리잡지를 통해 버리고 나눌수록 더 얻는다는 삶의 교훈을 배웠으니 오히려 내가 시각장애인들에게 더 감사하다”고 말했다.

곽민영기자 havefun@donga.com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