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제주 돌담

  • 입력 2003년 9월 15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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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덮친 태풍 ‘매미’의 엄청난 위력은 현장에서 비켜나 있는 이들의 눈을 의심케 한다. 찌그러진 대형 크레인과 날아가 버린 컨테이너, 차가 지붕 위에 앉아 있고 배가 뭍으로 올라와 민가를 덮친 모습은 마치 할리우드 영화 ‘트위스터’와 ‘스피드 2’를 연상케 한다. ‘매미’가 12일 오후 제주 지방을 지나칠 때의 순간 최대 풍속이 1904년 기상 관측 이래 최대치인 초속 60m였다니 가히 짐작이 간다. 시속으로 환산하면 F-1 경주용 자동차의 질주속도와 맞먹는 216km에 해당한다.

▷그런 거센 폭풍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전통 돌담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하니 새삼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가 놀랍다. 해일이 몰아친 성산포 등 바다쪽 돌담은 일부 무너져 내린 곳이 있지만 산과 들의 돌담은 별다른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제주의 산과 들, 해안가에 널려 있는 돌을 대충대충 쌓은 것 같지만 돌과 돌 사이가 성글고 콜타르를 바르지 않아 ‘바람의 리듬을 타는 돌담’으로 유명하다. 봄이면 활짝 핀 유채꽃과 어우러져 제주의 풍광을 더욱 빛내주는 이 돌담의 절묘한 구조역학에는 외국의 유명 건축가들도 혀를 내두른다.

▷제주 돌담은 그 용도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거센 바람으로부터 집을 보호해 주고 남의 밭과 내 밭의 경계를 구분해 준다. 밭에 돌담이 생긴 것은 경계선이 없어 세도가들이 힘없는 이들의 농토를 야금야금 집어 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후 토지의 침탈, 분쟁 등 폐해가 사라지고 우마(牛馬) 침입과 풍해까지 방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덤 주위의 돌담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기도 하다. 밭 한가운데 무덤을 만들고, 무덤 주위의 밭에서 작물을 길러온 제주 사람들은 오랜 자연재해와 고난의 역사 속에서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지혜를 일찌감치 터득했던 셈이다.

▷제주 돌담은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을 외겹으로 쌓아 통풍이 잘되고 전체적으로 구부러져 있어 바람을 직접 받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콘크리트로 물샐 틈도 없이 단단하게 만든 담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제주의 거센 바람을 견뎌낸다. 나무는 강한 바람에 맞서다 뿌리째 뽑히기도 하지만 풀은 일시 고개를 숙일 뿐 바람이 잦아지면 다시 일어서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강(强)한 것을 이기는 것은 유(柔)한 것이라는 무도(武道)의 가르침과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 수 없다는 ‘채근담’의 지혜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사상 최대의 폭풍에도 무너져 내리지 않은 제주 돌담이 갈등과 대결의 한국사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오 명 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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