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5월 29일 19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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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만남②

"저희들이 율현(栗縣)에 이르렀을 때 진군(秦軍)은 이미 성을 차지하고 북쪽으로 2십리나 올라와 숨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적이 먼저 작은 군사로 우리를 골짜기로 꾀어 들였는데, 주(朱)장군께서는 아무 의심 없이 우리 군사들을 그리로 몰아댔습니다. 여(餘)장군께서 말렸으나 소용없더군요. 주장군은 군사를 둘로 쪼개 가며 적을 쫓다가 마침내 좁은 골짜기에서 에워싸이고 말았습니다. 그걸 보자 여장군도 하는 수없이 남은 군사를 몰아 주장군을 구하러 갔는데, 저도 그 군사들 중에 있었습니다. 여장군과 저희들이 힘을 다해 치고 들자 적도 주춤하여 길이 열리더군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장군은 그렇게 여장군과 저희들이 목숨을 걸고 연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를 구하러 갔던 여장군과 저희들은 적병 가운데 에워싸여 죽어 갈 수밖에 없었지요. 저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으나 요행 임자 잃은 군마 한 필에 매달려 겨우 죽을 구덩이를 벗어났습니다.”

그래놓고 그 군관은 새삼 분한 듯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항량이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주계석은 어찌 되었느냐? 지금 어디 있느냐?”

억지로 화를 삭이고는 있어도 항량 또한 제 속이 아니었다. 오중을 떠난 뒤로 처음 겪는 패배인데다, 회계군수가 되어 처음 얻은 장수 중에 하나인 여번군(餘樊君)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군관이 이를 갈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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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 주장군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호릉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들을 자취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장군께 죄를 받게 될까 다른 곳으로 달아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항량도 억눌렀던 화를 마음놓고 터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입만 살아 떠들던 비렁뱅이 도적놈이 큰일을 망쳐 놓았구나. 내 이 도적놈을 잡아 대의의 무서움을 밝히지 않고는 서쪽으로 가지 않겠다!”

그리고는 계포를 불러 명을 내렸다.

“군사들을 풀어 주계석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주시오!”

계포가 발 빠르고 눈 귀 밝은 군사들을 풀어 알아보니 주계석의 행방은 곧 밝혀졌다. 그 군관의 말대로 주계석은 처음 호릉으로 돌아와 항량에게 구원을 청하려 했으나 제가 한 짓이 캥겼던지 백여 리 동쪽 설현(薛縣)으로 달아나 숨어있었다. 진군의 추격을 겨우 벗어난 패군(敗軍) 3천과 함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쪽 함양(咸陽)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 오던 항량이었다. 설현으로 가는 길은 거꾸로 동쪽이었으나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설현으로 군사를 휘몰아 갔다. 대군이 밤낮을 쉬지 않고 내달으니 다음날에는 설현에 이를 수 있었다. 항량은 군사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고을 전체를 에워싸듯 한 뒤 몸소 앞장 서 주계석이 머물고 있는 곳을 들이쳤다.

겨우 3천의 군사로 숨어있던 주계석은 감히 맞설 엄두도 못내고 달아나기부터 먼저 했다. 그러나 사방이 항량의 군사들로 에워싸여 그것도 뜻 같지 못했다. 주계석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에움 속을 내몰리다가 이름 없는 군사의 칼에 죽어 그 목만 항량에게 바쳐졌다.

“싸움에 진 것은 주계석의 죄가 아니다. 어려움에 빠진 아군을 저버린 게 그 큰 죄요, 함부로 본진을 벗어나 달아나려 한 게 더욱 큰 죄다!”

항량은 주계석의 목을 진중에 높이 걸게 하고 모든 장졸들에게 그렇게 알렸다.

주계석을 죽여 흔들리던 군심(軍心)이 가라앉히고 사기를 되살린 항량은 다시 대군을 서쪽으로 돌리려 했다. 그런데 양성(襄城)을 치러 간 항우가 떠날 때의 큰소리와는 달리 열흘이 가까워도 소식이 없었다. 항량이 사람을 양성으로 보내 사정을 알아보게 했더니 며칠 안돼 그 사람이 돌아와 알렸다.

“양성은 성벽이 높은데다 군민(軍民)이 힘을 합쳐 굳건히 지키는 바람에 부장(副將=항우)님의 용맹으로도 아직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앞으로도 가까운 날, 쉽게 성이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부장은 무어라고 하던가?”

“며칠만 더 기다려 주시면 반드시 성을 떨어뜨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항량은 장수 몇에 군사 3천을 딸려보내 항우를 돕게 하고, 자신은 설현에서 그들이 이기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 바람에 항량은 뜻밖으로 오래 설현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항량이 양성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장수가 백여 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항량을 만나러 왔다. 사인(舍人)에게 넣어보낸 이름을 보니 유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방이라.....누가 이 사람을 아시오?”

항량이 좌우를 돌아보며 그렇게 묻자 마침 가까운 곳에 있던 패현 사람 하나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유방은 원래 유계란 이름으로 풍.패(豊 沛)의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젊은 날을 보낸 건달이었습니다.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 벼슬살이를 한다는 게 겨우 정장(亭長) 노릇이었는데, 그나마 역도(役徒)들을 놓아준 죄로 쫓겨 망산과 탕산에 숨어산 적도 있지요. 그러다가 진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자 같이 들고일어나 현령을 죽인 패현 부로(父老)와 젊은이들의 추대해서 패현 현령이 되었습니다. 흔히 패공(沛公)으로 불리는데, 얼마 전까지도 진가(秦嘉)와 함께 경구(景驅)를 초왕(楚王)으로 섬겼던 자입니다.”

“세력은 어느 정도인가?”

“한때는 풍읍과 패현을 차지하고 인근 고을을 휩쓸어 제법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풍읍이 위나라로 넘어 가버린 뒤에는 많이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경구를 섬겨 적지 아니 회복했지요. 장함의 부장 사마니를 내쫓고 탕현(탕縣)과 하읍(下邑)을 차지해 지금은 만 명 가깝게 거느리고 있을 것입니다.”

“경구를 섬기던 자라…. 그런 자가 왜 나를 찾아 왔을까?”

항량이 그러면서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패공을 불러들이게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항량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오래잖아 한 멀쑥한 장수가 항량의 군막으로 들어왔다. 콧날이 높고 이마가 튀어나온 데다 길게 수염을 기르고 있어 어딘가 용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겁주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생김은 아니었다. 오히려 왠지 편안하고 만만한 기분이 드는 그런 사내였다.

“그대는 역적 진가와 더불어 경구를 초왕(楚王)으로 섬겼다고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목소리는 차가웠으나 그때 이미 항량의 마음은 반 넘어 풀려있었다. 패공 유방이 조금도 움츠러든 기색 없이 태연하게 받았다.

“그때는 진가와 경구가 있음을 알았을 뿐, 상주국(上柱國)께서 계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경구를 왕으로 섬기러 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군사를 빌려 맺힌 한을 풀고, 잃은 것을 되찾으려 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누구든 힘만 있으면 따르겠단 말인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세라면 어쩔 수 없겠지요. 거기다가 맺힌 한을 풀고 잃은 것을 되찾을 힘을 빌려준다면 누구에게라도 머리를 숙일 수 있습니다.”

패공이 그렇게 숨김없이 속을 털어놓자 항량도 조금씩 경계를 풀었다. 빙그레 웃으며 패공에게 물었다.

“공의 맺힌 한은 어떤 것이며, 그토록 간절히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요?”

“믿고 맡긴 사람에게 나고 자란 땅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을 한꺼번에 잃은 일입니다. 풍읍(豊邑)을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패공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옹치에게 품고 있는 원한이 그대로 얼굴에 타오르고 있는 듯했다. 항량이 이제는 진정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믿고 맡긴 사람이 누구며, 풍읍은 어찌하여 잃게 되었소?”

그러자 패공은 더욱 달아오른 얼굴로 욕설 반 저주 반 섞어 옹치가 위나라에 투항한 일을 일러바치듯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다 큰 아이처럼 항량에게 졸라댔다.

“제게 군사 만 명만 빌려주십시오. 반드시 옹치의 목과 풍읍 성을 상주국께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상주국의 깃발아래 들어 진나라를 쳐 없애는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패공을 보는 항량의 눈길이었다. 조금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다정하게 바라보는 게 철이 덜든 아우 보살피듯 했다. 평소 무엇이든 차분하게 따져보고 살피는 습성과는 달리, 벌써 패공을 다 알아보았다는 자신감까지 그 눈빛에 깃들어 있었다.

(약간 모자라 보이기는 하지만 씩씩하고 시원스런 호걸이다. 거두어 두면 쓸모가 있겠다.)

항량은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

거리면서도 겉으로는 무언가를 깊이 헤아리는 듯하다가 크게 인심쓰듯 말했다.

“좋소! 공에게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가진 장수 열 명과 군사 5천을 빌려주겠소. 당장 풍읍으로 가서 그토록 가슴속에 응어리진 욕됨과 분함을 씻으시오. 다만 뜻을 이룬 뒤에는 바로 돌아와 공의 말대로 내 깃발 아래서 싸워주어야 하오.”

뒷날 사랑하는 조카 항우가 그 패공을 상대로 분통 터지는 싸움을 벌이다가 마침내는 패망해 죽게되는 것을 미리 떠올려 보면 참으로 알 수 없는 항량의 호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잘것없는 지역세력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던 유방은 그렇게 항량의 그늘에 들면서부터 천하를 다툴만한 세력의 주공(主公)으로 자라가게 된다. 하지만 뉘 알랴. 그같은 그들의 만남에 이미 하늘의 뜻이 담겨 있었는지를.

그런데 사람의 헤아림으로서는 알아보기 힘든 하늘의 뜻은 그날 항량에게 또 다른 만남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방향을 달리하기는 하지만, 패공 유방에 못지 않게 항량에게는 뜻깊은 사람이 되는 범증(范增)과의 만남이었다.

그날 해질 무렵 뜻밖으로 쉽게 군사를 얻어 크게 세력을 부풀린 패공이 서둘러 풍읍으로 달려간 뒤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계포가 뛰듯이 항량의 군막으로 달려와 알렸다.

“범증 선생이 찾아오셨습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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