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생태-환경에 열정쏟는 작가 박경리

  • 입력 2003년 5월 27일 17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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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기자
김미옥기자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이자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인 박경리(朴景利·77)씨를 만나기 위해 26일 강원 원주시 흥업면의 토지문화관을 찾았다. 주변이 온통 푸르고 고즈넉해 “참 좋다”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곳. 그러나 알고 보니 박씨는 20여년 동안 살아온 이곳 원주를 떠나려고 했었다. “‘토지’ 집필을 끝내고 나면 저 낙동강 근처, 철새가 날아오는 갈대숲으로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새와 함께 노년을 보내고 싶었는데…. 1999년에 토지문화관이 생기는 바람에 제가 원주를 떠날 수 없게 됐죠. 너무 아쉽습니다.”》

햇살이 투명한 이날, 쪽빛으로 물들인 삼베 원피스 차림의 박씨는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단아해 보였다. 새에 관한 얘기가 이어졌다.

“새만 보면 가슴이 아파요. 어떻게 저렇게 날갯짓을 할까. 그건 살기 위한 몸부림이죠. 항상 어디론가 떠돌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걸 보면 눈물이 납니다. 내가 전생에 한 마리 새였는지도 모르죠.”

박씨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서울 청계천과 전북 부안군의 새만금 간척사업 현장을 떠도는 것 같았다.

4월부터 월간 ‘현대문학’에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지금 그의 관심사는 생명이고 환경이다. 그 중에서도 청계천 복원에 대한 관심은 각별하다. 지난해 토지문화관에서 청계천 복원 관련 세미나를 두 차례나 개최했을 정도로 그는 열렬한 청계천 복원주의자다. 사실, 원주를 찾기 며칠 전 인터뷰 요청을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문학 얘기는 하지 말고 청계천 복원 같은 환경 얘기만 하자”고 말한 터였다.

그가 꿈꾸는 청계천 복원은 인간 중심의 복원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복원이다.

“30년 전 서울에 살 때 청계천 둑을 걸어 목욕탕에 가던 일이 생각납니다. 강둑을 걸으면 묘한 정취가 있죠. 청계천이 복원되면 무수히 많은 생명이 함께 살아날 거고, 그렇게 되면 너무 아름다울 겁니다. 살아있는 것은 언제나 아름다우니까요.”

박씨에게 “청계천 복원을 앞두고 요즘 교통 문제 때문에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고 서울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에 대한 그의 반응은 단호했다.

“승용차를 타는 사람들의 불만이 많다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에 비하면 소수일 텐데 그 소수가 다수에 피해를 주면서 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형국이죠. 그들이 교통대란 운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양심이 없는 거죠. 짧은 순간의 불편을 참지 못하면 미래를 그르치게 됩니다. 모순 덩어리죠.”

그는 복원에 반대하는 청계천 상인들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상인들을 배려해야 하지만 상인들도 더 큰 것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생존권을 위해 청계천 복원에 반대한다고 하는데 생존권은 하루 한끼 이어가기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요. 기부하는 마음으로, 우리 후손을 위해 참아야 합니다.”

박씨는 문인들과 지식인들의 무관심을 질타하기도 했다.

“글깨나 읽는다는 지식인들이 파리의 센강은 다 알면서 청계천에 대해선 너무나 무심합니다. 하긴, 어디 청계천뿐인가요. 그런 지식인들이 밉습니다. 발 벗고 나서야지, 지식을 대체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건지. 녹음기처럼 달달 외우기만 하고, 절망적입니다. 우리만 살고 말겠다는 것인지, 막 욕이 나와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최근 창간한 문학환경 계간지 ‘숨소리’를 통해 환경과 생명에 관한 문인들의 글을 부지런히 소개할 작정이다.

그가 생명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무슨 특별한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고 책을 읽고 깨친 것도 아닙니다.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자연이 좋고 땅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노동은 삶을 정화시켜 줍니다. 제가 ‘토지’를 쓴 것도 땅이 좋고 일이 좋아서였습니다. 텃밭을 가꾸고 풀도 뽑고 돌도 치우고 나무도 심고 하는 것이 제 행복입니다.”

그는 애초부터 환경주의자 생명주의자였다. 그에게 모든 생명은 함께 살아가야 할 평등한 대상이다. 그가 환경이라는 용어보다는 생태라는 용어를 더 좋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환경은 인간중심적인 용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비가 춤춘다고 말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나비가 춤춘다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본 것일 뿐, 나비의 입장에서 그건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3시간 남짓 계속된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토지문화관에 걸려 있는 박씨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목에 힘주다 보면/문틀에 머리 부딪쳐 혹이 생긴다/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인생을 깨닫지 못한다/낮추어도 낮추어도/우리는 죄가 많다/뽐내어 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시간이 너무 아깝구나’(‘우리들의 시간’)

1969년부터 ‘토지’ 집필을 시작해 1994년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까지, 그 지난했던 25년의 세월. 그건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아 작가 자신을 낮추어가는 겸허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서울로 돌아오는 길, 먼발치로 한 무리의 새들이 날아갔다. 새가 되고픈 박씨의 희망 같았다.

원주=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박경리는 ▼

-1926년 경남 통영 출생

-1946년 진주여고 졸업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계산’을 발표하면서 등단. 이후 ‘표류도’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을 발표

-1969년 ‘현대문학’에 ‘토지’ 연재 시작

-1993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1994년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

-1994년 200자 원고지 4만장 분량의 ‘토지’ 집필 완료

-1997년 연세대 용재석좌교수

-1999년 강원도 원주에 토지문화관 건립

-2001년 한국문학번역원 조사 결과 박경리와 그의 작품 ‘토지’가 외국에 가장 알리고 싶은 한국의 대표 작가와 작품으로 선정

-2003년 ‘현대문학’에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 연재 시작. 문학환경 계간지 ‘숨소리’ 창간

-현대문학신인상 여류문학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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