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공허한 논리로 배부르랴

  • 입력 2003년 3월 5일 20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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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와 애덤 스미스. 200여년 전에 각각 이 땅과 영국에서 살았던 선각자들이다.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를, ‘경제학의 아버지’인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국부(國富)를 키우는 경제철학을 설파했다.

이들의 주장은 놀랍게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요약하자면 개인의 창의성과 상공업을 북돋워야 살림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북학의는 요즘 봐도 감탄할 만한 지혜가 그득한 책이다. 명분에 치우친 성리학자들의 어리석음을 통렬히 비판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가구당 빚이 2915만원으로 집계됐다. 전체로는 439조원. 쉽게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니다. 경제가 잘 돌아가야 이자도 내고 원금도 갚을 텐데 상황은 반대로 가고 있다.

은행과 신용카드회사에 빚진 많은 사람들이 제때 이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은행과 카드회사들은 빚 갚기를 독촉하는 전담직원을 늘리고 있다. 어떤 은행은 3월을 ‘연체 감축의 달’로 정해 담보물을 얼른 경매처리토록 다그치고 있다.

정부도 고민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가계가 줄줄이 파산하면 돈을 떼인 은행들도 덩달아 쓰러지기 때문이다. ‘제2의 경제위기’ 경고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외에서 한국경제를 관찰하는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의 가계부채 문제를 꽤 심각하게 보고 있다.

정부는 뭘 하고 있나. 결론적으로 말해 병인(病因)을 뿌리뽑는 수술은 하지 못하고 대증요법에 매달려 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치료는커녕 병을 악화시키는 쪽으로 칼을 휘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최근 “금융기관은 가계 대출을 자제하라”고 촉구하는 임시방편을 내놓았다. 이런 것으로는 미흡하다. 산더미 같은 빚을 갚는 근본 해법을 찾아야 한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원론을 보면 된다. 기업의욕을 되살려 자금이 생산부문으로 활기차게 흐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기업이 잘 돌아가야 일자리가 생기고 개인소득도 늘어날 것 아닌가.

개혁이라는 도그마에 집착한 나머지 기업을 움츠러들게 하는 정책이 남발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6대 그룹의 부당내부거래를 전면 조사하겠다고 4일 발표한 것도 개혁의지를 과시하는 이벤트 성격이 짙다고 본다. 물론 계열사끼리 부당하게 봐주는 거래를 했다면 당연히 의법처리돼야 한다.

그러나 조사를 하려면 조용히 진행하면 될 것이지 왜 그리 요란스러운지. 그리고 타이밍상으로도 최태원 SK㈜ 회장이 구속돼 있는 등 재계 분위기가 흉흉한 이때에 기업에 부담이 되는 조사를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민첩하게 대응해 조사권을 휘둘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공정위의 과거 행적으로 볼 때 이번 조사의 저의가 의심스럽기도 하다.실제로 공정위 조사나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으면 조사기간엔 정상적으로 기업활동을 하기 어렵다. 기업 임직원들은 오라 가라 하는 부름에 응하느라 일손을 잡을 수 없다.

경제정책 결정자들은 부디 북학의를 읽고 혹 자신이 세상 흐름을 잘 모르고 공소(空疎)한 논리에만 사로잡힌 책상물림 성리학자 스타일이 아닌지 겸허하게 반성해 보시라. 그리고 실학(實學)정신에서 한국경제를 살리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진지하게 찾아보시라.

고승철 경제부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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