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기묘한 전쟁’

  • 입력 2003년 3월 4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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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근대사에 ‘기묘한 전쟁(La drole de Guerre)’이라는 이름의 시기가 있다. 나치 독일의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서 1940년 5월 프랑스 공격까지 8개월이 여기에 해당된다. 아돌프 히틀러의 이웃 나라 침입으로 시작된 ‘작은 전쟁’은 프랑스 진입 단계에서 유럽의 강대국들이 어쩔 수 없이 개입하는 끔찍한 세계대전으로 확대됐다. 프랑스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다음 날 영국과 함께 총동원령을 내리고 다시 다음 날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프랑스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독일의 공격을 막기 위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파국의 날’을 기다린 것이다. 프랑스군은 독일과의 국경을 따라 건설된 마지노선에 틀어박혀 하릴없이 시간만 보냈다. 정부가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동안 겨울 추위와 독일의 집요한 선전공세는 프랑스 병사들의 사기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선전포고까지 했지만 정작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행동은 하지 못하고 대책 없이 기다리는 싸움, 그래서 ‘기묘한 전쟁’이었다.

현재 한반도 상황이 2차 대전 당시의 프랑스와 비슷하다. 독일의 침공위협을 북한의 핵 위협으로 대치하면 위기의 맥락은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아직은 전쟁을 피하기 힘든 절박한 형편은 아니니까 ‘기묘한 전쟁’ 대신 ‘기묘한 위기’라고 정의하면 어떨까.

먼저 국론분열. 한반도 남쪽의 남남갈등은 급기야 1946년 이후 처음으로 보수와 진보진영이 갈라져서 3·1절 행사를 치를 정도로 악화됐다. ‘지혜의 왕’인 솔로몬이 온다 해도 보수진영 행사에서 터져 나온 ‘좌익박멸’ ‘김정일 타도’와 진보진영에서 외친 ‘외세배격’ ‘미군철수’를 양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울에 온 북한 종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쏟아놓은 핵전쟁 위협도 남남갈등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들을 초청해 환대한 사람과 그들의 정치선전을 견디지 못해 “그만두라”고 외치는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

‘기묘한 전쟁’ 당시 프랑스도 심각한 국론분열을 겪었다. 특히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어 유럽을 양분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뒤 프랑스 정부가 공산당을 불법화하자 이념대립이 격화됐다.

위기에 대한 대응도 비슷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북핵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으나 아직도 확실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북-미 양자 채널에 의존할 것인지, 미국이 원하는 다자 채널에 힘을 쏟을 것인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핵 위기는 벌써 5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프랑스의 달라디에 정부는 1940년 3월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무력한 대응에 대한 책임을 졌다.

‘기묘한 전쟁’은 독일이 마지노선을 우회해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끝났다. 그리고 한달 뒤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기묘한 위기’는 어떻게 끝이 날 것인가. 불행한 결말을 원치 않는다면 지금 움직여야 한다. 분열된 국론봉합도 절실하고 북한의 위기고조 전략에 제동을 거는 것도 시급하다. 독일군이 마지노선을 우회전략으로 돌파했듯이 우리에게도 길은 있을 것이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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