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방송 장악, 제도로 막아야

  • 입력 2003년 2월 21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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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방송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고 권력자들은 입버릇처럼 떠들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순진한 사람은 없다. 권력자들은 정반대로 방송 장악을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방송을 지배하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라는 생각 때문이다. 요즘 방송은 신기술과 결합하면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과거의 방송과는 차원이 또 다르다. 지난 대통령선거도 어느 후보가 방송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 이런 마당에 권력자들의 사전에는 ‘방송 독립’ 같은 사치스럽고 쓸모없는 말이 들어 있을 리 없다.

방송이 공룡처럼 커지면 커질수록 방송 독립의 필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방송이 권력에 멋대로 악용된다면 해악이 얼마나 클지 가늠조차 어려운 시대다.

▼소수 정권의 한계와 방송▼

이 점에서 김대중 정부가 3년 전 통합방송법을 제정해 독립기구인 방송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은 ‘업적’으로 꼽을 만하다. 정부의 방송정책권을 방송위원회에 넘겨 형식적으로라도 독립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방송위원회가 그동안 제 역할을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방송위원회의 잘못도 있지만 정권이 방송 장악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통제에 나선 탓이 크다. 그럼에도 정권이 직접 ‘관리’해 온 방송을 일단 위원회에 넘겨준 발상 자체는 선진방송을 향한 상당한 진전이었다.

새 정권 출범을 앞두고 방송계에도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MBC 사장이 갑자기 사표를 냈고 KBS 사장은 교체설이 나돌고 있어 양대 지상파 방송의 사장이 함께 바뀔 가능성이 높다. 방송위원회 위원 9명도 새 인선을 앞두고 있다. 이 와중에 문화관광부는 방송위원회에 넘겨주었던 방송정책권을 회수하겠다는 ‘깜짝 카드’를 꺼내들고 나왔다. 방송계의 새로운 판짜기가 막후에서 진행 중임을 느낄 수 있다.

‘개혁과 참여’를 내세우는 노무현 정부는 방송정책에서 이전 정권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야 할 터이지만 그렇게 될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새 정부는 소수 정권의 약점 때문에 더욱 방송을 장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 모른다. 방송의 영향력을 활용해 부족한 힘의 균형을 맞추려는 전략은 새 정부가 충분히 염두에 둘 만한 것이다. 얼마 전 청와대 새 조직을 짜면서 홍보수석비서관을 신설하는 등 무려 10명의 홍보 관련 비서관을 포진시킨 것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새 대통령이 KBS와 MBC 사장에 누구를 점찍고 있다는 말이 당선자 주변에 무성하지만 법적으로 대통령은 인선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 KBS 사장은 KBS이사회가 추천권을 갖고 있으며 대통령은 추천된 인사를 임명하는 역할에 그치기 때문이다. MBC 사장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들이 선출하도록 되어 있으며 진흥회 이사는 방송위원회가 뽑는다. 그럼에도 사장 임명에 대통령의 뜻이 사실상 반영되어온 것은 관례처럼 해 왔기 때문이며 그 배경에는 방송 장악의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 이 관례가 새 정부에서도 이어진다면 그것은 개혁의 역행이요, 방송의 ‘권력 눈치보기’라는 나쁜 전통은 근절될 수 없다.

방송정책권을 정부가 다시 가져가는 문제도 심각하다. 이대로 된다면 우리의 방송 정책은 김대중 정부가 방송위원회를 출범시킨 이전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정부가 방송정책권을 이용해 방송을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위원회 독립성 강화를▼

사실 우리 방송제도가 현행대로라도 확실히 시행된다면 ‘방송 장악’이라는 얘기는 나올 수 없다. 현행 방송위원회 제도도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정권과 방송을 일단 분리시켜 놓은 것은 우리 형편에서는 ‘방송 독립’이라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천사라면 법은 필요없다’는 말은 명언이다. 새 정부를 향해 방송 장악을 꿈꾸지도 말라고 외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권력자들이 천사가 아닌 이상 공허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 방송위원회 제도를 방송 독립의 근본 취지에 맞게 더욱 강화하는 것이 방송 장악을 막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정권이 처음부터 방송을 장악하겠다는 엄두를 낼 수 없도록 말이다.

홍찬식기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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