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수묵/제자리 돌아간 ‘노사사’

  • 입력 2003년 2월 2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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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를 두 달 앞둔 지난해 10월 중순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10층 ‘홍보본부’에 광고 전문가 6명이 모였다. 이들은 자원자였으며 노무현(盧武鉉) 후보를 지지한다는 점을 빼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직장도 달랐고 일면식도 없었다. ‘외인부대’처럼 모인 이들은 광고전략을 맡은 기획국과 광고문안을 만드는 특수홍보국에 3명씩 배치됐다. 노 후보 선거광고의 핵심인 이들은 스스로를 ‘준(準)노사모’라고 불렀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하진 않았지만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노사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부분 광고회사의 간부급인 이들은 안정된 직장에 2개월간 장기휴가를 내고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광고대행료도 받지 않았다. ‘상업적 계약’이 아닌 ‘자발적 헌신’을 자청한 것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대가는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해 받은 식권과 일당뿐이었다. 한 관계자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면 뛰어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쟁이’ 정신을 고수한 것도 눈길을 끈다. ‘정치광고는 정당쪽의 간섭이 너무 심해 제대로 된 광고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게 업계의 통설. 그러나 이들은 ‘사공(비전문가)이 많다’는 정치판에서 광고의 전문성을 지켜냈다.

12월 초 노 후보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그것. 민주당 고위관계자들은 ‘정치적 재반박’을 소리 높여 주문했고 특별선거대책위원회가 열릴 만큼 당과 이들의 시각차는 컸다. 그러나 이들은 “소비자(유권자)를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공방에서 잠깐 승리하는 것이 ‘광고의 목적’은 아니다”며 노 후보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하는 자신들의 홍보전략을 고수했다.

광고업계의 한 인사는 “이들의 행동은 상식파괴적이었지만 수단과 방법은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이 점이 광고전을 승리로 이끈 비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노사모’와 ‘노사사’ 사이에는 닮은꼴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인다. 7만여명의 노사모 회원 중 일부의 일탈된 행동은 한 원로교수의 지적처럼 ‘철부지’로 비쳤기 때문이다.

투표일인 지난해 12월 19일 새벽 정몽준(鄭夢準) 의원의 노 후보 지지철회를 보도한 신문 수백부를 노사모 회원들이 ‘불법 선거물’이라며 수거한 것이 단적이 예다. 서울 마포구와 경기 고양시 일산구 등에서 동시에 발생해 조직적이라는 느낌을 준 이 사건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철부지’ 같은 발상이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1987년 9월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의 배후를 밝힌 인터뷰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월간지 ‘신동아’의 10월호 인쇄와 배포를 강제 저지한 것을 연상케 한다.

인터넷에 살생부(사람 죽이는 명부)를 올려 놓고 “떠도는 글을 정리했을 뿐”이라며 ‘나 몰라’ 식의 주장을 편 사람도 노사모 회원이었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총부리를 겨누고는 “장난감인데 왜 그러느냐”며 거꾸로 화를 내는 꼴이다.

노사모는 지난달 24일 전자투표를 실시해 50.5%의 지지(반대 49.5%)를 얻어 ‘사랑’이란 명칭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 ‘사랑’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는 두고 볼 일이다.

6인의 ‘노사사’는 개표가 끝나자 미련 없이 원래의 직장과 일상으로 돌아갔다. 한 관계자는 “단지 3개월에 한 번 얼굴만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공신(功臣)이니 ‘한몫’ 잡겠다는 생각은 없다고 했다.

최수묵 사회1부 차장 moo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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