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자신감의 두 얼굴

  • 입력 2003년 1월 3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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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광해군은 임진왜란에 이어 중국 대륙의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는 격동기에 나라를 이끌었던 군주다. 당시 명나라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국가였던 데 반해 청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무서운 기세로 팽창하고 있었다. 이 둘 사이에 끼어 있던 조선은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운신이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조정은 대부분 보은(報恩)론을 펴며 명나라를 도울 것을 주장했다. 우리가 오랑캐라고 부르며 업신여겼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가 청나라라는 점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왕세자 시절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쟁터를 누볐던 인물이다. 이 같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청나라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파악한 그는 대륙의 패권이 청나라에 넘어가면 큰 후환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럼에도 신하들이 명나라 쪽을 고집하자 광해군은 크게 노해 꾸짖는다.

▼외교 실패가 가져온 국난▼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로우니 이러한 때는 안으로는 실력을 키우고 밖으로는 정세를 잘 살펴야 나라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심을 보면 안으로는 일을 분변하지 못하면서 밖으로 큰소리만 친다. 우리나라 사람은 허풍 때문에 끝내 나라를 망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중에서)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에 대해 엇갈린 평가가 있지만 그가 외교 면에서 탁월한 전략가였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광해군 폐위 이후 외교 실패로 병자호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당하고 결국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음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새해가 밝았지만 올해 전망은 불투명하다. 북한 핵을 둘러싼 위기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가 여전히 우리에게 시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수백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광해군 시대와 요즘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변 정세가 우리로 하여금 외교적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같은 민족이면서 우리와 애증의 관계인 북한이 ‘명분’ 쪽에 가깝다면 주변국과의 협력관계는 ‘실리’에 속한다. 만약 우리가 어느 한 쪽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우리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면 광해군이 지적한 대로 ‘냉철한 현실인식을 갖고’ ‘우리 실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 내부는 어떤가. 지난해 ‘월드컵 4강’과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세력의 극적인 승리 등으로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 자신감이 충만해 있다.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감이란 주관적 감정이어서 지나치게 되면 현실을 보는 눈을 흐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자신감이 허풍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우리의 자신감이 부풀려져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져보는 것은 쉽지 않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와 분석이 객관성을 갖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외부 세계의 평가에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고무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해냈구나' 신드롬▼

한국 선수들이 국제 스포츠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냈을 때 ‘과연 한국이야’ ‘우리가 또 해냈어’라며 흥분하는 것은 스포츠경기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다른 나라의 정서와 큰 차이가 있다. 미국 같은 잘사는 나라로 이민간 교포 2세, 3세들이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을 때도 지나칠 정도의 찬사가 우리 내부로부터 터져 나온다.

반면에 외국으로부터 혹평이나 섭섭한 대우를 받았을 때는 정확한 상황 파악에 앞서 배타적인 감정의 분풀이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감정의 진폭이 크고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일수록 사리를 냉정하게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외교와 안보 분야는 힘과 힘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냉엄한 파워 게임이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차분한 마음으로 지난해 우리들의 성취가 가져다준 자신감이 얼마나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월드컵 4강’은 ‘세계 4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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