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 내셔널 어젠다위 제안]이종화/신중한 개혁

  • 입력 2002년 12월 22일 18시 54분


정권 초기는 잘못된 제도를 고치기에 좋은 시기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으레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개혁은 신중해야 한다. 무조건 이전 정권의 것을 부정하고 ‘갈아치우는’ 것으로 새 정권의 정체성을 삼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신(神)이 아니다. 모든 문제를 정부가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임기 중에 결론을 낼 일이 있고, 더 길게 보며 초석을 닦는 데 주력해야 할 일이 있다. 국정 과제만 수없이 나열하며 무리하게 모든 것을 바꾸려 하면 부작용이 더 크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강조하더니 ‘제2건국 운동’을 주창하고 이어 ‘신지식인 사회건설’을 언급하다가 ‘생산적 복지론’을 내걸었다. 국정의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정부는 이렇게 수많은 국정목표와 세부 과제를 제시했다. 개혁 자체보다 개혁의 과제를 생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다.

이 와중에 실제로 많은 개혁 과제가 말로만 그치거나 시행이 늦어졌다. ‘개혁 피로’라는 서글픈 유행어도 생겼다. 1999년 3월 만들어진 교육발전 5개년 계획 시안은 1년이 지나도록 시안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정부 개입의 증가로 경제 자유도 지수는 지난해 세계 38위, 올해는 52위로 추락해 시장경제에서 오히려 멀어졌다.

1948년 7월 정부조직법이 생긴 이래 49번이나 조직개편이 있었다. 1년에 한번 꼴. 특히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항상 큰 개편이 있었다. 국가전략이나 행정 수요에 대한 분석 없이 정권만 바뀌면 ‘개혁적 정부’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정부조직을 흔들었다. 매번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주창해왔지만 항상 정부는 커졌고 공무원도 증가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제대로 검증 없이 정부 부처와 공기업의 고위직에 대거 진출하는 현상도 반복됐다. 여러 설문조사에서 개혁이 가장 미진한 부분으로는 단연 ‘정부 부문’이 꼽힌다.

성과는 없는 문어발식 개혁이 되지 않으려면 개혁의 목표와 우선 순위부터 뚜렷이 해야 한다. 그리고 개혁은 정부 부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성공한 기업들에서 정부가 배워야 한다.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 맞는 정부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제 개혁을 하겠다는 ‘선언’을 상품화해서는 안 된다.

이종화 고려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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