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창조된 고전´

  • 입력 2002년 12월 13일 17시 38분


◇창조된 고전/하루오 시라네·스즈키 토미 엮음 왕숙영 옮김/535쪽 1만9000원 소명출판

일본 신감각파 소설가 요코미츠 리이치가 “너무 처참해서 문학화할 수 없다”고 단언했던 1923년 9월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민속학자 오리쿠치 시노부는 거의 유일하게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서사시 형식의 작품 ‘모래연기’를 썼다. 하지만 ‘조선인은 독약을 넣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유언비어를 비판하지 않았고 조선인을 멸시하는 센진(鮮人) 혹은 ‘불령귀순민’이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는 결국 ‘일본 신의 뜻’이라는 황국사관을 반영한 것이었다.

일류 지식인 우치무라 간조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조선인 폭행단체인 자경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이 점은 지식인 개인의 양심의 유무보다는 당시 일본 내부의 지식 담론 형성의 총체적 과정이 개입돼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후자의 시선으로 일본의 고전들이 20세기 전후로 어떻게 정전(正典·canon)의 특권적 지위를 얻게 됐고 그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어떻게 국가주의적 정체성과 관련한 중요 담론 공간을 만들어냈는가를 살핀 책이다. 1997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개최된 국제 심포지엄 ‘정전 형성-젠더, 내셔널 아이덴티티, 일본문학’의 성과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등 대체로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학자들이 참여해 일본 ‘밖’의 시선으로 일본 고전의 ‘안’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일본 ‘내부’를 해부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아무래도 ‘만요슈(萬葉集)’, 여류 일기문학, 이세 이야기(伊勢物語), 바쇼의 하이쿠가 정전화돼 가는 과정을 보여 준 논문들보다는 고전, 정전 형성 과정이 일본의 국민, 국가주의 신화 형성 과정이나 제국주의 정책과 어떻게 상호 길항(拮抗)하며 역동적 시스템을 확보해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한 논문들이다.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천황제와의 관계를 논한 고노시 다카미츠, 민속학 연구와 식민 정책의 관계를 논한 무라이 오사무, 일본 미술을 통해 서구의 대항 담론을 만들고 ‘근대의 초극’을 시도한 사실을 지적한 고진 등의 경우가 이 책의 기본 의도에 보다 근접해 있는 듯하다.

일본 민속학을 창시한 야나기타의 경우는 우리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일본 민속학에서 그의 권위는 지금도 건재하다고 알려져 있다. 민속학이 수입된 것이 아닌 일본 고유의 학문 곧 ‘신국학’이라 주장한 그는 고급 관료로 한국병합에 깊숙이 간여해 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야마토(大和) 민족에 동화돼 멸망해 가는 민족으로서의 ‘아이누’를 연구한 ‘산인(山人)’ 연구가 일본의 조선 지배의 선례를 찾는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데에서는 식민지배의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진다. 당시 일본 고전의 지위를 얻게 되는 많은 문헌들이 사실은 식민 지배를 내부화하는 것, 곧 일종의 정치의 미학화를 강화하는 파시즘적 전략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 책을 읽는 우리의 입장이다. 당시 조선에서의 조선주의, 향토주의, 고전론 등의 국학 운동의 부활이 사실은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라는 일본 국가주의 담론과 멀지 않다는 점이다. ‘멸망의 담론’ 및 고전 연구가 일본에서는 황국민, 신민의 특권의식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이 됐던 반면, 식민 지배 하에 있던 조선의 경우 ‘민족’ 그 자체가 회복해야 하는 ‘현실적 실체’로 인지됐다는 점에서 보다 현실감 있고 설득력 있는 담론이 되기도 했다. 이는 이 책의 독서가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해체적 독법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설총이 ‘토를 만들었다’든가 하는 한국과 관련된 부분에서 사실 관계의 미흡함이 보이는 점, 일본 국가주의 형성 과정을 보는 각 논문들의 미세한 입장 차이 등은 충분히 고려하면서 읽어 나가야 할 듯싶다.

근대문학 연구자들에게 고진의 방법론이 유행했던 기억을 되살려보면, 일본 서적의 번역과 그것을 통한 방법론의 기계적 모방은 서구 번역서에 이은 또 다른 ‘정전에 대한 예속’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지식 담론 내부의 반성이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조영복 광운대 교수·국문학 eternity@daisy.gw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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