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조기숙/정치와 국민 수준

  • 입력 2002년 12월 10일 18시 15분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큰일날 것처럼 선동하지만 이는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나라가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지켜온 사람은 ‘지도자’가 아닌 ‘민초’들이기 때문이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도, 금 모으기 운동에 장롱 속 금붙이를 들고 나온 사람도, 강도를 잡으려다 혹은 수해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다 민초들이다. 두 여중생을 억울한 죽음으로부터 살려낸 이도 이름 모를 네티즌이다. 소위 여론 선도층은 광화문의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국익은 안중에도 없이 감상적인 반미주의자가 되는 것을 경계하지만 그들은 이미 지도층의 훈계를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성숙하다.

▼民意 반영할 공정한 틀 없어▼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위대한 지도자 덕분이 아니다.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무슨 일을 했나.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거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전쟁이 나자 절대로 피란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도망간 뒤 다리를 끊어 버렸다. 힘 있는 자들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고, 돈 있는 자들은 탈세와 외화 밀반출을 일삼는다. 식자(識者)들은 소외층보다는 힘 있는 쪽에 줄서기 바쁘고, 명문교는 출세 지향형 인간들이 서로 밀어주는 끄나풀로 작용한다.

그 숱한 외세의 침탈과 왜곡된 역사 속에서도 대한민국을 오늘까지 지켜온 사람은 지도층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초들이다. ‘정치인은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말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정치인은 국민의 수준을 반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왜 현명한 우리 국민이 이제껏 수준 이하의 정치인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대의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유권자에게 주어진 대안 중에서 선택을 강요할 뿐 대안을 만들어낼 권한은 부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좋은 대안이 있다 하더라도 민심이 왜곡되지 않고 정확하게 선거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규칙과 심판관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도는 항상 기득권 세력에 유리하게 돼 있다. 제도는 한번 만들어지면 오랫동안 지속되는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선투표가 도입되지 않는 것, 선거운동기간 중에는 여론조사의 공표가 금지되는 것, 대학 내 부재자투표소 설치가 그렇게 어려운 것,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도입되지 않는 것 등은 기득권의 욕구를 누르고 제도를 변경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말해준다.

우리 사회에서 국민이 원하는 수준의 사회변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권력에 가장 비판적이어야 할 주요 언론이 민주화 이후 스스로 기득권 세력화됐기 때문이다. 올 한 해만 해도 민초들은 변화에 대한 욕구를 여러 방법으로 표출했다. 하지만 언론은 이러한 현상을 예측하지도,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내지도 못했다. 언론이 민심과는 동떨어져 있기에 시민은 언론을 신뢰하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여론을 형성해가고 있다. 지난달 18, 19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언론의 공정성에 대해 실시한 설문에서 부정응답(43.1%)이 긍정응답(39.1%)과 엇비슷하게 나타난 것은 언론에 대한 시민의 불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民心은 天心´ 에 겸허해야▼

제도나 언론이 민심을 정직하게 대변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주주의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중요한 선거마다 민심이 현명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도 인터넷도 없던 5공 시절 YS와 DJ가 이끄는 신민당은 1985년 총선에서 창당 며칠 만에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다. 그 후 신민당은 1987년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수행했다. 16대 총선에서 유권자는 낙선운동 대상자를 70% 떨어뜨리기도 했다. 정당들이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지 못할 때에는 역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로 양당을 질책하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 대선은 모처럼 양자대결로 치르게 됐다. 선거에서 양자대결이 중요한 이유는 유권자의 의사가 왜곡 없이 결과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데 있다. 크고 작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유권자가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정치인을 선택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국민이 어느 후보의 손을 들어줄지 자못 궁금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선거야말로 국민의 수준을 가늠할 시금석이 될 것이다.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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