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주한미국대사

  • 입력 2002년 12월 9일 18시 34분


주한 미국대사 자리는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요직으로 꼽힌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유명한 싱크탱크의 책임자를 비롯해 많은 미국인들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었다. 일에 대한 욕심이나 정치적 야망이 있는 사람들이 주한대사를 선호한다고 한다. 대북 문제 등 굵직한 현안을 다루기 때문에 능력을 잘 발휘하면 160여명의 미 대사 가운데 단연 돋보일 수 있기 때문. 반면 선거자금을 낸 덕분에 대사 자리를 얻게 된 경제계 인사들은 업무가 과중하지 않고 문화적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 유럽을 선호한다.

▷미 대사와 한국 정부의 관계는 한미관계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초대 대사인 존 무초는 말할 것도 없고 5대 대사였던 월터 매카너기만 해도 4·19혁명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두 차례 방문해 하야를 권유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90년대 초까지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한국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고 장담하는 대사가 있었다. 미 대사가 요구하면 언제든지 한국 대통령이 면담을 수락한다는 뜻이다. 위상이 특별한 덕분인지 미 대사들은 현직을 떠난 뒤에도 한국인의 뇌리에 오래오래 남는다. 제임스 릴리, 도널드 그레그, 스티븐 보즈워스….

▷지난주 별세한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대사는 재임 시절 주한미군 철수 논란, 박정희 대통령 피살, 12·12 군부 쿠데타,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모조리 지켜봤다. 그의 회고록 ‘깊숙한 개입, 제한된 영향력’에는 한국 권력층과 미 대사의 ‘내밀한 교류’가 담겨 있다. 그가 12·12 이틀 뒤인 79년 12월14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대사관저에서 2시간 동안 ‘부드러운 가운데 긴장이 감도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 등은 미 대사의 역할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는 “잘못 알려지거나 신군부 지도자들이 비난을 미국에 전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한 복잡한 사태의 진상을 바로잡기 위해 회고록을 썼다”고 했지만 한국 독자는 미국의 영향력을 함께 읽지 않을 수 없다.

▷17대인 토머스 허버드 대사에 이르러 주한 미 대사의 위상이 바뀌는 것 같다. 여중생 사망에 대해 부시 대통령의 간접사과까지 전달했으나 한국인의 분노를 달래는 데 실패했다. 한국 경찰이 철통같이 막고는 있으나 대사관 주변에서 연일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으니 대사로서의 일상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긴 90년대 반미시위가 심할 때는 잠자던 미 대사가 학생들의 관저침입에 놀라 침대 밑으로 숨은 적도 있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와 미 대사 관계가 더욱 긍정적으로 바뀌기를 바란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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