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재호/돌아온 키신저

  • 입력 2002년 12월 1일 18시 35분


헨리 키신저(79)가 돌아왔다. 9·11테러 진상조사특위 위원장이 돼 워싱턴에 복귀했다. 1977년 국무장관을 끝으로 공직을 떠난 지 25년 만이다. 그가 특위를 어떻게 끌고 갈지 궁금하다. 미국 정보기관들이 9·11테러를 왜 막지 못했는지가 조사의 핵심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그를 기용한 배경을 놓고도 말이 많다. 공화당측은 “진실 규명을 위해선 키신저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결국 부시 자신에게 돌아갈 책임의 화살을 키신저라는 방패로 막아 보려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특위의 활동기간이 1년6개월이니까 최종 조사결과는 차기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둔 2004년 여름쯤 나올 것으로 보인다. 재선을 노리는 부시 대통령으로선 공화당의 대부격인 키신저에게 특위를 맡기는 것이 여러모로 마음 편했을 것이다.

키신저만큼 논란에 휩싸여 있는 인물은 없다. 1970년대 미-소(美蘇) 데탕트와 미-중관계 정상화를 실현한 20세기 최고의 외교전략가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선 약소국쯤은 쉽게 짓밟아버리는 책략가이자 비밀외교의 신봉자라는 평도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지난해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된 ‘키신저 재판’이란 책에서 키신저를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 할 전범(戰犯)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베트남전쟁 평화협상을 고의로 지연시켰고,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고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수립을 돕는 등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철학이 갖는 장점은 좀처럼 무시하기 어렵다. 국제정치에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은 늘 있어 왔지만 우드로 윌슨은 물론 지미 카터 식의 이상주의조차도 그 적실성을 잃은 지 오래다. 오늘날 세계의 어떤 정치지도자도 이성(理性)과 여론에 호소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키신저는 평화 유지의 수단을 세력균형에서 찾았다. 어느 한 국가가 독점적인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국가 또는 세력 사이에 힘이 균분(均分)돼 있는 체제가 그렇지 못한 체제보다 더 평화롭고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외교에 이데올로기가 개입하는 것도 싫어했다. 이데올로기는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대결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힘과 국익이 한 나라의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돼야 하며, 외교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제한된(절제된)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그는 재야에서도 한결같이 이런 기조 위에서 역대 정권에 충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세력균형을 위해 러시아 독일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군을 빼내지 말라, 인권 시비로 중국을 자극하지 말라는 것 등이 그의 일관된 주문이었다.

1993∼94년 북핵 위기 때는 당시 클린턴 정부에 “북한의 의도는 핵 개발을 위한 시간 벌기”라고 지적하고 “북한에 양보만 하지 말고 분명한 시한을 제시한 뒤 북한이 이를 지키지 못하면 제재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키신저 예찬론을 편 게 아니다. 대북정책이건 외교건 모든 것은 현실의 토양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현실주의자들은 보수적이고, 역사를 냉소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따위의 비판쯤은 잠시 잊자.

북핵 문제가 풀릴 기미가 안 보이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키신저에게서 배울 게 있다면 바로 현실주의의 미덕이다. 햇볕론자나 대선 주자들 모두 예외가 아니다. 그가 마키아벨리라고 해도 크게 상관할 일이 아니다.

이재호 국제부장 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