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플레이보이 SF 걸작선 1·2'

  • 입력 2002년 11월 29일 17시 51분


◇ 플레이보이 SF 걸작선 1·2/앨리스 터너 엮음 한기찬 옮김/1권 328쪽 2권 259쪽 각권 9000원 황금가지

책 표지를 보면서 출판사가 자못 비장한(?) 심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색 ‘PLAYBOY’글자와 그 유명한 토끼머리 로고가 검은 바탕에서 눈에 확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독자들이 이 책을 거리낌없이 집어들까?

사실 ‘플레이보이’는 여느 저속한 성인잡지들 중 하나로 치부하기엔 좀 아까운 면이 있다. 카스트로나 마르케스 같은 인물들의 인터뷰 기사가 실릴 만큼 유연하고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사회정치적으로 예민한 주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기사도 빠지지 않는다. 천박한 정도를 굳이 따지자면 그래도 성인잡지들 중에서는 가장 양반축에 들 것이다. 물론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폭로한 대로 ‘여성의 상품화를 조장했다’는 악역은 무시 못하겠지만.

SF문학계에서 ‘플레이보이’라는 매체가 차지하는 위상 또한 각별하다. 1960년대 이전까지 대부분의 SF작가들은 주류문학계의 관심 밖에서 떠도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다가 차츰 독자층의 외연을 넓혀간 주요 매개체 중 하나가 바로 이 잡지였다. ‘플레이보이’는 그 어떤 SF잡지들보다도 더 후한 원고료를 지급하며 꾸준히 SF작가들의 작품을 게재했다.

쉽게 말해서 웬만한 중견 작가라면 다들 한번씩은 ‘플레이보이’에 작품을 발표해왔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작가 입장에서는 이 잡지가 선사하는 어떤 느슨함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본격 성인용’ 제재를 다루는데 별 주저함이 없었을 터이니.

대충 이런 정도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보자. 우선 작가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아시모프나 하인라인 대신에 아서 클라크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 좀 의외이긴 하지만, 아무튼 멀리는 50년대부터 현재까지 영미SF문학계에서 내로라하는 쟁쟁한 작가들이 망라되어 있다.

작품들 역시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골고루 안배되어 있어서 시대상의 흐름은 물론 SF적 감성의 미묘한 변천도 감지할 수 있다. 로버트 셰클리나 커트 보니거트 같은 경우는 바로 이 책에 실린 작품을 표제작으로 삼아 훗날 단행본 작품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스토리나 설정도 우주여행, 외계인 같은 고전적인 테마에서부터 바로 지금 21세기 초입에 더 의미심장한 가상현실 개념의 확장까지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노먼 스핀래드의 ‘어떤 임종’에서 찡한 감동을 느꼈다.

모든 이들이 늙지도 않고 영생불멸할 수 있는 세상에서 어떤 부부가 아들을 얻었는데, 유전적 돌연변이라서 늙어죽어야 한다. 엄마와 달리 애써 아들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심정이 애틋하다.

작가들 중 가장 의외의 인물은 빌리 크리스탈. 그렇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남자주인공인 바로 그 배우이다. 예전에 우디 알렌이 쓴 단편 판타지를 읽고 의외로 재밌고 재치가 넘쳐 감탄한 적이 있었지만, 솔직히 같은 스탠딩 코미디언 출신이라고 해도 빌리의 작품은 그에 미치진 못한다. 그래도 주말에 집 거실에 앉아 읽어본다면 이 사람의 작품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일 것 같다.

작품 선별은 ‘SF’팬들보다 ‘플레이보이’독자들을 더 배려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한마디로 너무 어렵지 않은 이야기들로 SF팬들과 일반독자들 공히 만족할 만하게 차려진 맛깔스러운 성찬이라고나 할까.박상준 SF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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