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계 거목' 존 롤스를 기리며]정의론 몸소 실천한 스승

  • 입력 2002년 11월 27일 18시 38분


존 롤스
단일 주제의 철학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평생 ‘정의(justice)’라는 한 우물만을 팠던 철학자, 그러면서도 당대에 영미는 물론 유럽 대륙의 전역에, 그것도 철학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계 전반에 큰 획을 그은 20세기의 거목 존 롤스 교수가 24일 타계했다. 특히 필자는 그와 가진 사적 인연들 때문에 애도의 정이 남다르다.

그의 저서인 ‘정의론’의 한국어 번역을 끝낸 뒤(1979년) 정의론과 관련된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던 필자는 풀브라이트의 지원으로 1980∼81년 하버드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어 꿈에 그리던 롤스 교수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필자가 선물로 준비한 족자에는 ‘주역’에 나오는 ‘利, 義之和也’, 즉 ‘각자의 몫이 조화로우니 이롭도다’라는 귀절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해준 역서와 족자를 반기며 점심을 사 주던 그의 정겨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롤스 교수는 마른 체구에 키가 큰 시골 아저씨같은 소박한 인상이었다. 수줍음을 잘 타는 그는 가끔 더듬는 듯한 어눌함으로 인해 훨씬 더 비사교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따뜻한 가슴과 자상한 마음을 가진 스승이었다.

먼저 고인이 되었으나 롤스 교수보다 상당히 연하로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의 저자인 로버트 노직 교수가 당시 하버드대에서 함께 강좌를 개설하고 있었다. 노직 교수는 정해진 강의안도 없이 10여 권의 책을 교실에 들고 와 이책 저책 뒤적이며 번득이는 통찰을 학생들에게 쏟아붓던 천재형 선생님이었다면, 롤스 교수는 오래 다듬어진 강의 자료를 시간마다 배부하고 또박또박 강의를 진행하여 다소 고지식한 선생님 같았다.

학기 초에는 두 강의 모두 2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 왔지만, 학기 말 롤스 교수의 강의에는 200여명이 그대로 유지됐으나 노직 교수의 강의는 20여 명으로 줄어든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롤스 교수는 대단한 사상가(thinker)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성실하고 자상한 스승(teacher)이었다.

1996년 미국 서부 해변도시 산 호세에서 개최된, 그의 ‘정의론’ 출간 25주년 기념 국제 콘퍼런스에서 그를 뵌 것이 마지막 만남이 됐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다산기념 철학강좌’의 첫 연사로 한국에 초청하겠다고 간곡히 부탁드렸으나, 그는 정중히 거절하면서 건강이 긴 여행을 견디기 어려울 정도라 했다. 얼마 후 롤스 교수는 뇌중풍을 맞으셨다.

황경식 서울대 교수

롤스 교수의 정의론이 남긴 유산은 정의 원칙의 실질적 내용이나 방법론적 접근에 있어, 그리고 국내적 정의(‘정의론’ 참조)는 물론 국제적 정의(‘만민법’ 참조)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도 소중한 자산임이 분명하다.

특히, 우리의 경우 통일 한국의 정치적 이념을 구상함에 있어 계약론적 접근에 의한 자유주의적 평등 이념이 매우 시사적인 참조의 틀이 될 수 있음은 그의 철학을 연구하고 있는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듯 싶다.

세상의 온갖 부정의를 잠시 잊으시고 정의로운 세기의 전사여, 부디 영면하소서! 황경식 서울대 교수·철학

hwangks@conma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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