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문명호/프레스티지호

  • 입력 2002년 11월 21일 18시 45분


미국 알래스카주 남부에는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라는 해협이 있다. 1778년 영국인 선장 밴쿠버가 당시 국왕 조지 3세의 왕자 이름을 따 명명한 곳이다. 해협의 수역과 주변은 주립 공원으로 높은 산, 빙하, 피요르드, 동굴과 작은 섬들이 산재해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한다. 그리즐리곰, 대머리독수리와 고래, 바다수달, 물개, 각종 바닷새들이 서식하는 세계적인 해양 및 만(灣)생태계의 보고다. 잔잔한 바다는 보트 항해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으로 꼽히며, 인근 발데스항 등을 기점으로 하는 선박 크루즈 관광의 명소이기도 하다.

▷천국같이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닌 이곳에 1989년 3월 24일 재앙이 덮쳤다. 알래스카 원유 22만t을 싣고 발데스항을 떠난 미국 유조선 엑슨 발데스호가 암초에 걸려 파손되는 바람에 4만1300t의 기름이 바다에 유출되었다. 해안선 1600㎞가 오염되었고, 25만마리의 바닷새, 2800마리의 바다수달, 300마리의 물개, 250마리의 대머리독수리, 그리고 수많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엑슨사는 청소비용으로만 21억달러(약 2조5000억원)를 써야 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환경오염 사고였다. ‘엑슨 발데스호 사고’는 그후 지금까지 선박에 의한 해양오염 사고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대서양의 스페인 근해에서 7만7000t의 중유를 싣고 싱가포르로 가던 바하마선적 유조선 프레스티지호가 폭풍을 만나 두 동강난 채 19일 침몰했다. 이 과정에서 1만t의 기름이 유출됐다. 반경 수백㎞의 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였고 물고기와 새들이 죽어가고 있다. 배가 가라앉은 바다는 수심이 3.5㎞나 돼 배 안의 기름을 뽑아 올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더구나 연료용 중유는 독성이 원유보다 강하고 정화작업도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남아 있는 6만t의 중유가 심해에서 유출될 경우 환경 생태계에 끼칠 영향은 가공할 정도가 될 것이다. 엑슨 발데스호 사고를 능가하는 해양오염 사고가 될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엑슨 발데스호 사고가 난 이듬해 국제해사기구는 적재톤수 600t 이상의 모든 유조선은 이중선체 또는 그 이상의 구조를 갖추도록 의무화하는 국제협약을 채택했다. 문제는 이미 건조된 유조선들은 2007년까지는 사용할 수 있도록 돼있다는 점이다. 프레스티지호는 76년에 건조된 단일선체 유조선이다. 전 세계 바다를 떠다니는 1만t 이상의 유조선 중 52%가 이 같은 단일선체의 배라니 우리 바다에서도 언제 어떤 배가 프레스티지호로 변할지 생각만 해도 걱정이다.

문명호 논설위원 munm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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