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경환/국회, 더는 헌법유린 말라

  • 입력 2002년 11월 11일 18시 22분


TV 드라마 ‘야인시대(野人時代)’가 엄청나게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법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는 시대에 주먹의 미덕을 부각시키는 폭력물이라니, 실로 시대착오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드라마가 국민을 사로잡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세태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닐까. 불신을 일으킨 주범이 따로 있을까, 있다면 그들은 국회의원들이 아닐까.

대통령선거라는 잔치판을 앞두고 목전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삼모사(朝三暮四),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는 이들의 안중(眼中)에는 유권자에 대한 신의도, 소속 정당에 대한 의협심도 전혀 없다. 이들에게 법이라는 외형적인 방패가 마련된 것을 오히려 억울하고도 괘씸하게 생각하는 국민이 많다.

▼절차 무시당한 법치시대 법안▼

이런 국민정서가 의송 김두한(義松 金斗漢·1918∼1972)이란 청년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암울한 시대의 활극을 부활시킨 것이다. 분명 우리 사회에서 ‘야인’의 시대는 물러간 지 오래다. 이민족의 지배도, 독재자의 압제도 사라졌다. 그래서 이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법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옳은 법이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정당한 절차에 의해 제정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국민의 이름으로 나라의 법을 만드는 일을 맡은 국회의원들이 정해진 절차마저도 깡그리 무시하였다면 여간 큰 일이 아니다.

7일과 8일 양일간 국회를 ‘통과한’ 44개의 법안이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헌법 제49조는 ‘국회는 헌법 또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공, 사의 영역을 불문하고 하루에도 수만건이나 열리는 이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회의에 적용되는 기본 전범(典範)이다.

실로 상식에 속하는 이 규정을 국회가 스스로 어겼다니! 시인 황지우는 우리 헌법을 아홉 차례나 변태성욕자에게 유린당한 가련한 여인에 비유했다. 법학자 박홍규는 ‘그들이 헌법을 죽였다’라고 외쳤다. ‘그들’, ‘변태성욕자’가 과연 누구인가.

더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러한 변칙적 행위를 여야가 함께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침묵의 공조를 통해 추인하였다는 사실이다. 문득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구절이 떠오른다. 사사건건 정쟁을 일삼는 정치인들에게 균형의식을 심어줄 방법은 없을까. 걸리버의 기상천외한 발상인즉, 훌륭한 외과의사 둘을 뽑아 여야 양당의 지도자들의 머리통을 톱으로 절반 자르게 한다. 그리고 잘라낸 뇌의 절반을 상대방의 골속에 집어넣으면 균형감각이 잡힐 것이라고 한다. 다행스럽게 적어도 이 시점에서 우리의 국회의원들에게는 굳이 걸리버의 외과의사가 필요없을 것 같다. 이렇게 같은 생각을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야인시대를 그리워할까. 왜 김두한의 무용담이 그리울까. 문득 역대 국회의사당에서 일어난 치욕적인 사건의 하나인 1966년 ‘국회 오물투척사건’이 떠오른다. 재벌의 밀수사건을 옹호하는 국무위원들을 향해 민족 정기의 이름으로 ‘매우(梅雨)’를 뿌린 그의 망동(妄動)이 영웅담으로 부활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 사건으로 인해 김두한의 야인시대는 종말을 고했지만, 그의 망동에 약간의 향수마저 느낀다. ‘법의 시대’의 낙수(落穗)치고는 실로 씁쓸하기 짝이 없는 낙수다.

▼´문제법안 재의결´ 당연▼

더 이상 헌법이 유린되어서도, 장식물에 그쳐서도 안 된다. 더 이상 국회의 직무상 위법과 태만을 좌시해서도 안 된다. 국회가 문제된 법안의 재의결 절차를 밟겠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하니 뒤늦게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헌정의 중요한 전환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진정으로 우리에게 헌법과 국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다시금 곱씹어 보는 것이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학장·한국헌법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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