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조폭신드롬

  • 입력 2002년 10월 16일 18시 19분


조직폭력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에는 ‘선한 악당’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이 일부 작용하는 것 같다. ‘선한 악당’이란 영국의 로빈 후드나 우리나라의 홍길동 같은 의적(義賊)들을 말한다. 폭력을 사용해 돈을 빼앗지만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도적들이다. 뛰어난 재주와 담력을 지닌 이들이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을 혼내주는 통쾌함 때문에 그에 수반되는 폭력 행위는 가려진다. 어느 영화에서는 조폭들의 몸에 새겨진 ‘착하게 살자’는 문신 때문에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다. 한 번 웃자고 만든 대목이겠지만 요즘 조폭들도 나름대로 착하게 사는 기준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로빈 후드가 활약하던 때와 오늘날은 시대 상황이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조폭들이 미화되고 있는 것은 이들의 어느 한쪽 측면만을 부각시킨 대중매체의 책임이 크다. 지난해 ‘친구’ 등 조폭 영화가 잇따라 성공한 데 이어 풍운아 김두한의 생애를 다룬 TV드라마 ‘야인시대’가 절정의 인기를 누리면서 조폭 신드롬을 이어가고 있다. 시청자에게 TV 보는 재미를 선사하곤 있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걱정된다. 의협심과 승부의 법칙 등 폭력세계의 가치관들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96년 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영됐을 때 폭력배를 흉내내는 청소년들이 크게 늘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적 있다. 얼마 전에는 영화 ‘친구’를 보고 같은 반 친구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는 ‘싸움에서 이기는 법’ 등 폭력과 관련된 잔인한 내용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조폭들의 활동이 최근 권력과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와 비교되는 현상은 더 큰 우려를 자아낸다. 조폭들이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집단이기는 하지만 대형 비리를 저지르는 권력층보다는 그래도 나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자칫 더 나아가면 조폭이 뭐가 잘못이냐는 엉뚱한 논리로까지 비약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물론 이런 문제에서 우선적인 비판의 대상은 조폭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이라기보다 부패한 권력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지난 몇 달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권력층의 부정과 비리는 어떤 조폭 영화보다도 생생하게 법과 질서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선한 악당’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조폭은 조폭일 뿐이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에 폭력을 부추기는 조폭 신드롬마저 확산된다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힘이 약한 자는 더욱 살맛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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